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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1 나는 왕초고양이로소이다 30
못 미친 존재감, 왕초고양이 흰노
누구나 왕초고양이가 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왕초고양이가 될 수는 없다.
왕초고양이는 말 그대로 고양이 중에서는 지존의 자리다.
고양이 마을의 촌장이나 추장쯤 된다고 할까.
가만이의 영역인 폐차장 자동차에서 낮잠을 자다 깬 흰노.
내가 살펴본 바로는
과거 우리 동네에 바람이라는 왕초고양이가 있었다면,
여기서 십리쯤 떨어진 이웃마을에는 흰노랑이가 왕초고양이 노릇을 하고 있다.
나는 녀석을 ‘흰노랑이’를 줄인 ‘흰노’로 불러왔다.
그동안 대모네 아이들을 비롯해 고양이별로 떠난 까뮈나
승냥이, 순둥이가 낳은 아이들이 이 녀석의 핏줄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되는 까닭은 과거 대모가 축사에서 살아갈 때
흰노는 자주 이곳을 출입했고,
까뮈가 새끼를 낳을 무렵에도 녀석은 그 곁을 지켜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더랬다.
달콤한 낮잠을 깨운 나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흰노.
순둥이와 승냥이와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도 나에게 여러 번 포착되었다.
대모와는 아직까지도 친하게 왕래하면서
가끔 사료도 나눠먹는 사이다.
왕초고양이 흰노의 영역은 확실하지가 않다.
확실하지가 않다는 것은 어디까지가 이 녀석의 영역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흰노의 활동반경을 보면 워낙에 넓어서
순둥이의 영역인 메인 골목으로부터 노을이와 무럭이네가 거주하던 개울집 인근은 물론
가만이와 카오스의 영역인 폐차장과 대모의 땅인 돌담집 인근까지
녀석이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다.
대모와 꼬미의 영역인 돌담집에서도 녀석은 제집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최근에는 우리 동네 아랫마을인 역전 인근에까지도 녀석이 나타난 적이 있다.
과거 바람이가 관할하던 우리 동네 영역과 비교해 보면
거의 몇 배에 달하는 광활한 영역이다.
이건 거의 왕초고양이로서 광개토대묘에 가까운 통치력이다.
사실 흰노의 성격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꽤 온순하고 동네의 모든 암컷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박애주의묘다.
대모와 함께 사이좋게 낮잠을 자는 흰노.
차기 왕초고양이를 노리던 노을이와의 사이만 안좋았을 뿐,
이웃마을의 모든 고양이와 녀석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사람에게만큼은 경계심이 심해서 가는 곳마다 얼굴을 마주치는
나와 아직도 제대로 안면을 트지 못했다.
아마 녀석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가는 곳마다 저 인간이 있군!”
노을이와 무럭이네 영역이었던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 흰노.
얼마 전에는 녀석이 가만이의 영역인 폐차장의 망가진 자동차 위에서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녀석은 귀찮은 듯 게으르게 눈을 떴다.
내가 사진을 몇 컷 찍어대자 흰노는 어슬렁어슬렁 자동차에서 내려와
지프차 쪽으로 걸어갔다.
흰노는 그곳이 마치 자신의 영역인 양 느긋하고 익숙하게 행동했다.
약 한달 전 무럭이 앞을 지나던 흰노의 모습. 차밑에 노을이가 있어서 살짝 긴장한 모습.
얼마 전 대모네 영역인 돌담집에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함께 사료를 먹고 대모와 함께 돌담집 아래서 사이좋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식구나 다름없는 편안함이었다.
뭐 보기에 따라서는 천하의 난봉꾼이나 카사노바일 수도 있겠지만,
동가식서가숙하는 자유로운 히피묘의 분위기도 살짝 풍기는 녀석이다.
그동안 <길고양이 보고서>에서의 존재감은 미미해서 ‘못 미친 존재감’에 불과했지만,
고양이마을 고양이들 사이에서의 존재감은 확실히 ‘미친 존재감’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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