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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6.29 이 순진한 아기고양이를 보세요 38
이 순진한 아기고양이를 보세요
누군가는 고양이가 재수없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고양이가 무섭다고 말한다.
그런 분들에게 나는 갓 태어난 아기고양이의 눈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새벽하늘을 닮은 라임색 눈동자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과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그 눈빛을 보게 된다면
당신의 편견도 사르르 녹아버릴 것이다.
뒤란길 그늘에서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아주 잠깐 나와 눈을 맞추던 아기고양이.
나 또한 맨 처음 아기고양이의 눈빛에 반했다.
하늘에서 막 떨어진 별빛같은,
너무 아름다워서 왠지 측은해 보이는,
결국 그 눈빛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얼마 전 이웃마을 여울이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은데 이어
축사고양이였던 가만이도 비슷한 시기에 네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여울이는 출산 전부터 배가 불룩해서 출산시기를 대충 예상할 수 있었지만,
가만이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사료배달을 갔다가
돌담집 뒤란에서 젖을 먹이는 가만이를 목격했다.
축사고양이였던 가만이가 낳은 아기고양이 중 고등어무늬 두 마리.
새끼들은 벌써 태어난 지 한달은 돼 보였다.
몸집으로 보아선 여울이네 새끼들보다 며칠 정도 늦게 태어난 듯했다.
야트막한 돌담 너머에서 내가 부스럭거리자
젖을 먹던 아기고양이들은 혼비백산 달아나기 시작했다.
삼색이 한 마리는 가장 먼저 뒤란을 줄달음쳐 앞마당 나뭇단 속으로 몸을 숨겼고,
카오스 무늬를 한 또 한 녀석도 부리나케 나뭇단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고등어무늬의 작고 연약한 녀석 하나는
잰걸음으로 도망치다 내 얼굴이라도 확인하겠다는 듯 뒤돌아서 나와 눈을 맞췄다.
어두운 뒤란의 그늘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아기고양이의 눈빛!
두려움이 가득한, 그러나 호기심을 차마 떨치지 못한 그 순진한 눈빛에
나는 잠깐 심장이 떨렸다.
다들 도망을 치는데도 도리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와 당신 누구요,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당돌한 녀석.
어느 누가 저런 눈빛을 보고도 고양이가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주 잠깐 나는 녀석과 눈을 맞췄다.
그러나 사심이 가득한 내 눈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 저 눈빛을 찍어야만 해, 라고 욕심을 부린 나머지
그 순진한 눈빛의 주인공은 곧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어미 곁에 남아 있던 한 녀석은
내가 도망을 왜 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어리고 연약한 아기고양이는 생후 한달이 되면 이렇게 혼자서 돌담을 넘고 나무더미를 타고 오를줄 안다. 스스로 생존의 기술을 배우는 거다.
녀석의 눈빛은 당돌한 눈빛 그 자체였다.
당당하고 매서웠다.
아무리 옆에 어미가 있었다고는 하나 처음 만난 낯선 사람 앞에서
녀석은 주눅도 들지 않고 당돌하게
당신은 누구요, 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는 글쎄요... 고양이 밥 주는 사람인가? 하고 말할 뻔했다.
내가 셔터를 누르건 말건 녀석은 개의치 않았다.
가만이가 네 마리의 아기고양이를 낳은 나무더미 둥지. 각목과 폐자재에는 온통 날카롭고 위험한 못이 삐져나와 있다.
아기고양이들에게 정신이 팔려 옆에 또다른 고양이가 앉아 있다는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옆에는 대모가 앉아 있었다.
거의 한달 만에 보는 대모다.
축사를 떠난 뒤로 한동안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무슨 일인지 돌담집 뒤란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었다.
아마도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예전의 급식장소로 먹이원정을 온 듯했다.
나무더미 둥지에서 키튼 사료를 먹고 있는 아기고양이.
다음 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대모는 여울이와 가만이, 가만이 새끼들과 어울려
돌담집 뒤란에 머물렀다.
대모가 낳았던 새끼들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다면 가만이의 새끼들보다 훨씬 몸집이 커 있을 텐데...
손자들을 보는 대모의 눈빛은 어쩐지 조금 쓸쓸해보였다.
모성애가 강한 대모가 배가 고파서 여기까지 올 지경이라면
분명 새끼들 한두 마리는 데리고 왔어야 한다.
그런데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뭔가 좋지 않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아기고양이, 엄마와 함께 할머니와 함께. 손자를 바라보는 대모의 쓸쓸한 눈빛.
사나흘쯤 가만이의 새끼들과 눈을 맞추고, 먹이를 주다보니
녀석들은 조금씩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급기야 어제는 3~4미터 앞에서 내가 보고 있는데도
스스럼없이 먹이를 먹었다.
가끔씩 고개를 들어 나를 경계하긴 했지만,
더러 내가 발이 저려 발을 푸는 소리에 놀라 나무더미 속으로 숨어들긴 했지만,
짧은 시간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던 거다.
네 마리 아기고양이의 어미가 된 가만이가 돌담 위 메꽃 너머에 앉아 있다.
가만이의 새끼들은 할머니인 대모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여리와도 꽤 친하게 지냈다.
당돌하게 내 눈앞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고등어무늬 녀석은
여전히 당돌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아무래도 훌륭한 고양이가 되겠는걸,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여울이네도 여섯 마리,
가만이네도 네 마리,
합해서 열 마리의 식구가 갑자기 늘어났다.
이제 슬슬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건가.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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