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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1 눈과 시와 바람의 에움길 변산반도 7

눈과 시와 바람의 에움길 변산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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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시와 바람의 에움길, 변산반도


해가 중천에 뜬 채로 퍼붓는 황홀하고 눈부신 눈떼.

 

청호지 가는 길에 눈떼를 만났다. 눈부신 눈떼. 해가 중천에 뜬 채로 눈이 퍼붓는 풍경은 그야말로 황홀했다. 청호지에서 만난 적막한 은세계. 초록색 호수와 푸른 하늘과 흰 눈더미가 절묘하게 어울린 가운데 너댓 척의 쪽배가 호숫가에 매어져 심심한 풍경을 보완한다. 눈 감고 아무렇게나 찍어도 그림이 되는 풍경이 있다면, 여기가 바로 거기다. 사실 청호지는 낚시꾼들에게는 좀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저수지로 통한다. 봄 가을로 안개가 뒤덮은 새벽 청호지에 고기를 잡는 쪽배 몇 척이 떠 있는 풍경은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여백이 풍부한 눈 내린 겨울 청호지의 담백한 풍경에는 비길 바가 못된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림같은 풍경. 청호지의 겨울.

 

눈떼는 청호지를 다 빠져나와서야 그쳤다. 하지만 꿈틀거리며 바다로 뻗어 있는 30번 국도의 꼬리는 눈더미로 덮여서 지나는 차들이 모두 거북이 운행이다. 변산반도를 따라가는 바다와 갯벌과 구름과 바람이 묻어나는 해안의 에움길. 여러 번 이 길을 다녀봤고, 여러 번 차를 멈추고 구경했던 에움길이지만, 이렇게 폭설 속을 헤쳐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드넓은 새만금 갯벌이 제 쓰린 속내를 드러낸다. 백합이 넘쳐나는 계화 뻘밭도 바지락이 지천인 해창 갯벌도 방조제 공사와 함께 을씨년스런 갯무덤으로 변해버렸다.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드넓은 줄포만 갯벌 풍경.

 

새만금 갯벌을 지나면 채석강이 지척이다. 격포항에서 보는 채석강의 층층절벽은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절경이다. 격포항 오른편에 우뚝 솟은 닭이봉 아래 마치 만권의 책을 쌓아올린 듯 층층겹겹의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이 바로 채석강이다. 시인 차창룡은 <채석강, 부서지는 책들 너머에서>란 시에서 “저 수만 권의 책 중 / 맨 밑에 있는 책 한 권을 빼면 / 저 책들 / 와르르 무너질 것인가 / 맨 밑에 있는 책 빼지 않아도 / 무너지고 있다”고 썼다. 요즘 채석강이 너무 유명해져서 채석강을 보러 가는 방파제 주변은 따개비처럼 많은 포장마차가 점령한지 오래인데, 아무래도 “책 빼지 않아도” 무너지는 채석강을 보는 듯하다.

 

호랑이등긁개나무라고도 불리는 호랑가시나무의 겨울 열매.

 

흔히 부안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변산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변산반도는 동쪽을 뺀 삼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산세와 바다의 아름다움을 함께 만날 수 있는 해륙 국립공원이다.

         

         그리움, 변산 앞 가을 뻘처럼 펼쳐져도 발 들여놓지 말아라, 뻘은 산 자의 자궁 아니니, 그리움 발 앞에 던져두고 썰물 밀물 건너다보아라 (중략)

         채석강 단층처럼 쌓이기만 하느냐, 속절없이, 가락도 안되는, 음향을 부여잡고, 그래, 아침의 옆으로만 난 길섶에서, 그래, 주저앉자는 것이냐


         -- 이문재 <변산 숙모의 소리> 중에서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라본 폭설로 뒤덮인 내소사 풍경.

 

시인 이문재는 ‘변산 숙모의 소리’를 통해 뻘과 바다와 같은 세상의 이치를 이야기한다. 뻘같은 그리움과 꿈의 바깥에 대해서도. 그에게 변산은 숙모의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며, 매양 들여다보는 내면의 거울과 같다. 나와 같은 여행자에게는 갯벌이 하나의 사진 찍기 좋은 풍경이지만, 갯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푹푹 빠지는 삶의 현장이다. 더더욱 삼면이 바다와 갯벌로 둘러쌓인 변산반도에서는 바다와 갯벌이 언제나 사람을 먹여살리고,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득하게 눈을 뒤집어쓴 내소사 대웅전 풍경.

 

변산 북서쪽에 새만금이 있다면, 남서쪽에는 줄포만 갯벌이 있다. 이 곳의 갯벌은 국내에서 가장 큰 바지락밭이기도 해서 썰물이 나면 수십리 갯벌밭으로 바지락을 캐러 가는, 꼬리에 꼬리를 문 경운기의 행렬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궁항, 모항, 곰소항 등 줄포만에 삶을 기댄 포구마을도 변산의 절경 속에 연이어 펼쳐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내소사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진서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는 흔히 절로 가는 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살 중 하나로 꼽히는 내소사 꽃살문.

 

내소사의 아름다움은 대웅전의 꽃살문에서 두드러진다. 이 곳의 꽃살문은 마치 하나하나의 꽃잎이 살아움직이듯 정교하게 조각돼 있으며, 연이어 맞추어 나간 솜씨가 절묘한 조형미를 풍긴다. 색이 바래 나뭇결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천연한 꽃잎들. 연꽃은 연꽃대로, 모란은 모란대로 여기서 사철 꽃을 피운다. 시인 이종수는 <내소사 꽃살무늬>에서 이 꽃살을 “돌부처 웃음” 같다고 했다. “살얼음을 깨고 들어가듯 / 눈에 쌓인 전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가니 / 꽃색은 씻기고 그립던 자태만 남은 / 돌부처 웃음 같은 꽃살이 / 긴 광목 빨래를 턴 것처럼 / 수많은 물방울로 떠다닌다”


개암사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

 

변산반도를 감싸도는 에움길은 곰소항과 곰소염전을 지나 보안면에 이르러 끝이 난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줄포이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안이다. 곰소염전은 바로 변산반도의 끝자락에 있고, 줄포와 부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소금밭 너머로 보이는 소금창고 몇몇은 기울어졌고, 몇몇의 소금밭은 양어장으로 변했다. 알아주던 곰소염전의 소금도 이제는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기울어가는 고향이자 빛바랜 추억처럼 안쓰럽고 가련하다.

 

        소금 자루 묶고 난 쓰라린 손으로 썼는지

         군내버스 앞 창문에 빨간 글자로 해 단

         줄포 지나 곰소

         바다를 끼고 넘실대는

         소금밭과 헌 창고들을 보면

         한평생 반도 못 채운 명예퇴직자가 되어서야

         찾아온 고향, 어둠마저

         두툼한 비곗살 위로 왕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


         -- 이종수, <줄포 지나 곰소> 전문.


저녁 노을에 물든 한겨울의 곰소 염전.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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