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름발이 길고양이의 형제'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3.29 짝 잃은 길고양이의 하루 (29)

짝 잃은 길고양이의 하루

|

짝 잃은 길고양이의 하루


우리 동네 길냥이 세계의 최고 멋쟁이 모냥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녀석은 절름발이 고양이와 형제지간이었다.

얼마 전 <가여운 절름발이 길고양이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기사를 올린 적이 있다.
거기서 절름발이 고양이를 괴롭히던 회색 고양이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이 고양이가 내가 요즘 부쩍 관심을 갖고 있는 길고양이다.


모냥이가 둥지에서 잠을 자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절름발이를 괴롭히던 회색 고양이의 만행은
아마도 과격한 장난이었던 것만 같다.
절름발이 고양이를 구조해 수의사에게 맡긴 뒤
몇 며칠이 지난 후 녀석이 살던 둥지를 찾았을 때,
그곳에는 바로 절름발이를 공격하던 회색 고양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로
둥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둥지에서 일어난 모냥이(위). 턱도 긁고 글루밍도 한다(아래).

둥지가 자리한 골목의 치킨집 청년에게 물어보니
원래 이 회색 고양이와 절름발이 고양이는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것이었다.
작년 겨울 11월 말쯤 녀석들이 태어나
줄곧 이 골목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치킨집에서는 이 녀석들에게 그동안 남는 닭고기를 먹이며 키워 왔다고 한다.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요란한 기지개를 켠다.

절름발이가 다친 뒤 2개월 넘게 회색 고양이는
이 절름발이 고양이의 보호자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절름발이를 공격하고 괴롭히던 장면은
동생에게 좀 과격하고 심하게 장난을 쳤던 것이고,
그 과격한 장난에 나는 녀석을 오해했던 셈이다.


"근데 절름발이는 어디 갔어요?" 라고 내게 묻는 것만 같은 모냥이의 눈빛.

어쨌든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가끔씩 녀석의 둥지를 찾아 200원짜리 소시지도 던져주고
고양이 통조림도 서너 번 갖다 바쳤다.
절름발이 고양이가 떠난 뒤, 약 한달 넘게
회색 고양이는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듯했다.
마실도 잘 안 나가고 둥지만 지키고 있는 모습이 자주 내 눈에 띄었다.


모냥이가 영역을 벗어나 마실 나간다. 차 밑에서 세탁소 쪽을 바라보는 모냥이(위). 천천히 길을 건너 세탁소로 걸어간다(아래).

녀석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건 최근 들어서이다.
녀석의 하루는 둥지에서 일어나 글루밍(고양이 세수)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참을 구석구석 온몸에 침을 발라 깨끗하게 단장한 뒤,
녀석은 둥지를 나와 앞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켠다.


세탁소 앞에 도착한 모냥이. 한발 늦었다. 먹이가 없다.

치킨집에서 닭고기 먹이를 놓아준 날이면
그것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먹이가 없는 날이면 세탁소 쪽으로 먹이 마실을 나간다.
녀석은 전형적인 코숏보다 다리가 길고 생긴 것도 멋져서
나는 이제껏 ‘모냥이’라 불러왔다.


텃밭 공터로 나온 모냥이.

어쨌든 모냥이는 그렇게 둥지에서 나와 세탁소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러나 먹이창고인 세탁소 앞에도
이미 다른 길냥이들이 사료를 먹은 뒤여서 남은 것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모냥이는 치킨집이 문을 여는 저녁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희봉이와 깜냥이가 노는 것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녀석은 일찍이 배를 채우고 나온 희봉이와 깜냥이 남매에게 줄레줄레 다가간다.
동네 텃밭 인근 공터가 바로 녀석들의 놀이터다.
희봉이와 깜냥이는 공터에 버려진 화분을 곡예하듯 넘어다니며 놀다가
모처럼 찾아온 모냥이를 본다.


희봉이와 깜냥이와 함께 놀고 싶어 관심 끄는 행동을 해보지만, 별로 관심이 없다.

엄연히 이곳은 희봉이와 깜냥이의 영역이므로
모냥이는 예의 두 녀석의 눈치를 보며 함께 놀자고 한다.
희봉이와 깜냥이 남매가 시큰둥하자
녀석은 텃밭 한가운데 자리한 은행나무 타기 묘기를 선보이며 환심을 사려 애쓴다.
모냥이 나무 타는 솜씨는 거의 다람쥐에 가깝다.
희봉이와 깜냥이는 신기한듯 그것을 한참 바라보기만 한다.


모냥이의 은행나무 타기 묘기. 녀석은 다람쥐만큼이나 나무를 잘 탄다.

희깜 남매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자
모냥이는 혼자서 나무 그늘에 들어가 놀다가
화분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하고
공연히 밭 둔덕에 올라가 우렁찬 고함도 질러본다.


"봤지? 가르쳐줄까?" "아니!" 그래도 관심 없는 희봉이.

이곳이 바로 절름발이 동생과 자주 놀러와 장난치던 곳이다.
녀석은 그 때의 추억이라도 생각난 듯
화분 위에 올라가 한참 절름발이와 놀던 텃밭을 내려다본다.
원래 이 녀석도 형제가 네 마리나 되었다.


마실을 접고 집으로 갈 생각을 한다.

하지만 두 마리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뒤에 죽고,
겨우 살아남은 절름발이는 다리가 다쳐
모냥이가 보호자 노릇을 해야만 했다.
그 마음이 사람과 같다면,
아마도 지금 모냥이의 머릿속에선 그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을 것이다.


모냥이가 텃밭 둔덕에 올라 오래오래 무언가를 본다. 녀석들에게도 기억이란 것이 있다면, 옛날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이다.

저녁까지는 아직도 해가 창창한데,
모냥이는 일찌감치 마실을 접고 천천히 둥지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짠해 보인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길고양이 보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13) 2008.04.07
손들고 벌서는 길고양이 보셨나요  (18) 2008.04.05
우리 동네 길고양이 이력서  (9) 2008.04.04
고양이 하우스 길냥이 아빠  (49) 2008.04.02
꽃구경 나온 '낭만 고양이' 남매  (36) 2008.04.01
짝 잃은 길고양이의 하루  (29) 2008.03.29
벽냥이  (10) 2008.03.27
길냥이 하품 5종 세트  (9) 2008.03.26
좌절 고양이  (10) 2008.03.17
눈장난하는 길고양이  (13) 2008.03.14
길고양이 짝짓기 어떻게 할까  (18) 2008.03.13
Trackback 0 And Comment 29
  1. 이전 댓글 더보기
  2. 재밌다 2008.03.29 14:48 address edit & del reply

    다음에 포스트 된 이글을 보고 와서, 님의 다른 글들도 읽어봤어요. 절름발이 고양이도 봤는데, 너무 너무 불쌍하더군요. 사람과 도시에서 공생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 참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같은 생물인데, 아무리 더럽고 난장판을 만들고 해도 느끼는 고통은 마찬가지일텐데. 어린 고양이가 그런 모습으로 지냈다는게 맘아프더군요. 불교에서 삶은 고통이라는 말이, 그냥 헛소리는 아닌것 같네요. 아무리 지구촌 지구마을 해도 이 지구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로 사람들은 아파하고, 길고양이는 나름대로 아파하고, 정말 삶의 한부분이 고통이 맞는거 같네요. 종종 오겠습니다. 고양이를 관찰하시는 모습이 연구하는 수준처럼 보입니다.

  3. dhdudska 2008.03.29 15:14 address edit & del reply

    절름발이고양이 어케됏는지 소식이 궁금하네요

  4. Favicon of https://raingallery.kr BlogIcon 장대비 2008.03.29 15:2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멋지십니다.
    고양이를 바라보시는 따뜻한 시선이 모니터를 통해서도 느껴지네요.
    저희 동네에도 길에 사는 고양이들이 많은데 다시보게됩니다..
    절름발이가 다시 모냥이와 만났으면 좋겠어요.

  5. 천상가 2008.03.29 16:23 address edit & del reply

    모냥이라는 고양이. 스타일 좋네요. 지저분해보이지도 않고. 털빛도 좋고.

  6. 곰둘아빠 2008.03.29 16:25 address edit & del reply

    고양이를 정말 많이 사랑 하시는 군요. 참 잘생긴 녀석 이네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7. ㅋㄷㅋㄷ 2008.03.29 16:35 address edit & del reply

    어찌 그리 길고양이를 잘 따라다니시면서 사진도 잘 찍으시네요 ~ 대단하십니다 ㅋ 저는 가까이만 가도 도망가던데 ~ 저도 절음발이랑 모냥이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치킨집?사람이 저 고양이가 원래 4마리 였다 이런걸 아는것도 너무 신기해요~ 아무튼 절음발이 편도 잘 봤는데 오늘도 클릭해보니 같은분이시네요~~ 재밌게 잘봤어요~~

  8. 모모누나 2008.03.29 17:15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잘 보고있어요.
    볼때마다 찡해지네요 ㅜㅜ
    길냥이들 밥 더 열심히 줘야겠어요 ㅜㅜ

  9. Favicon of http://blog.daum.net/jangbogo12 BlogIcon 장보고 2008.03.29 18:02 address edit & del reply

    dall-lee님 덕분에 길고양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되었답니다.
    항상 멋진사진 감사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10. 절름발이는 어디로 갔죠? 2008.03.29 18:24 address edit & del reply

    다리 나으면 다시 쟤한테 데려다주시는건가요?

  11. Favicon of https://meffect.tistory.com BlogIcon 달빛효과 2008.03.29 20:0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사실 전 이 회색고양이... 다리다친 고양이를 괴롭히는 고양이로 처음 보고,
    '눈 오는 날 고양이' 라는 게시물에서 보고는 '앗... 그때 그 괴롭히던 고양이네...' 하고 알아봤었거든요.
    근데 많은 분들이 이쁘다 이쁘다 하시기에..ㅎㅎ '그때 그 고양이네요' 라는 말은 안했었어요.
    뭐 이쁜 것도 사실이고, 괜히 '그때 그 불쌍한 절름발이고양이를 괴롭히던 못된 회색고양이잖아요!' 하기엔
    고양이의 영역본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사실 본능대로 행동했던 고양이려니 하고 이해하고,
    이쁘긴 이쁘다 하면서 계속 사진을 봤죠~

    근데 오늘 보니 형제고양이였네요... 그때는 은근히 '너~~ 그때 그 회색고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ㅋㅋㅋ 너무 웃겨요 제가...암튼 오늘은 오해가 풀려서 좋네요...
    길고양이들은 형제끼리 쌈박질을 좀 해도... 서로 같은 영역에 살면서 정말 잘 챙겨주던데...
    절름발이가 치료받으러 가서 지금은 새로운 묘생을 살게 될테니...
    모냥이도 혼자 쓸쓸하더라도 생활을 개척해나가는 거겠네요...
    그래도 체온을 나누던 형제 없이 혼자가 되니 우울하긴 우울하겠어요... 아 정말 짠해요..ㅠ_ㅠ
    너무너무 예쁜 모냥이인데... 좋은 사람을 만나 함께 살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따뜻한 시선의 사진들 잘 보고 있어요...

  12. 피오나 2008.03.29 22:31 address edit & del reply

    고양이에 관한 책을 내셔도 될 듯 합니다.
    예리하게 관찰과 글도 멋지게 잘 적으시고...
    요즘에는 길거리 고양이를 보면 한 번 더 보게 되더라구요..
    ㅎㅎ
    즐거운 주말 잘 보내셔요^^

  13. ^^ 2008.03.30 03:48 address edit & del reply

    재밌게 읽고갑니다. ^^ 참 절름발이 소식도 궁금하네요. 잘 지내고 있겠죠. 맘씨좋은 수의사분과...

  14. :-) 2008.03.30 05:28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고갑니다. 읽고나니 저희집에 있던 고양이가 생각나네요. 두 마리가 있었는데 (형제는 아니고 어쩌다가 둘이 살게 됐음) 한 녀석이 집을 뛰쳐나간 이후로 다른녀석은 한동안 밥도 잘 안먹고 우울해하고 그러더라구요. 그 두녀석들도 상당히 과격하게 놀았는데... 집나간 녀석은 밥이나 얻어먹고 다니는지 궁금해집니다.

  15. ㄷㄷㄷㄷ 2008.03.30 08:47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나 자세히 관찰하다니... 혹시 직업이 동물생태학 쪽이신가??? ㅡ.ㅡ;;

  16. 길냥이사랑 2008.03.31 16:01 address edit & del reply

    너무 이쁘게 생긴 녀석이군요..
    다리다친 아가의 형제였다니..맘이 짠하네요
    다리다친 아가소식이 무척궁금한데..좋은집에 가서 잘살고있는지..
    인석도 어디 업둥이로 입양갔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17. 2008.04.01 09:51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18. 로지 2008.04.01 16:22 address edit & del reply

    아.. 절름발이 아가가 이 녀석과 형제였군요... 다친 아이 일만 생각했지 이렇게 남는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모냥이가 혼자된 모습을 보니 맘이 짠하네요...
    그래도 동네분들 참 좋으신 분들만 있나봅니다. 아이들 밥 챙겨주시는 분들도 많구요.. 요즘 냥이들 쫓아버리기에 정신없는 곳이 많던데 ㅡㅜ

  19. 2008.04.03 13:1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 Unsung 2008.04.19 07:25 address edit & del reply

    따뜻합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21. 그 때 일은 2010.02.28 07:30 address edit & del reply

    모냥이가 절름발이한테 야단치는 게 아니었을까요?ㅋ
    얌마 다리도 성치 않은 자식이 어딜 함부로 싸돌아다녀!!! 정신이 있는거야!!!
    이런 식으로...
    그냥 그런 생각도 들어요ㅡ 보호자 노릇을 하는 입장에서는

prev | 1 |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