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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에 나온 연평도, 북한 땅이 코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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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에 나온 연평도의 어제와 오늘




10월 4일 <1박2일>에서는 꽃게 산지로 유명한 연평도 편이 방영되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연평도가 과거 연평해전이 일어났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정작 연평도가 어떤 섬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연평도는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 카페리호는 4시간이 걸리는 먼 섬(인천에서 127킬로미터)이다. 바다에서 보면 소연평도와 대연평도가 함께 보이는데, 앞에 보이는 뾰족한 산을 가진 섬이 소연평이고, 옆으로 길게 펼쳐진 섬이 대연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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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항구로 돌아가고 있는 꽃게잡이배. 음력 정월이면 꽃게잡이배 선주들이 풍어제를 지낸다.

뱃길에서 만나는 소연평의 명물은 얼굴바위다. 소연평 등대가 있는 절벽이 바로 얼굴바위로 옆에서 보면 코와 입이 툭 불거져나온 것이 사람의 옆 얼굴을 제대로 닮아 있다. 배는 소연평 선착장을 지나 대연평 당섬선착장에 사람들을 부려놓는다. 당섬과 대연평은 시멘트 다리로 연결돼 있어 걸어서 10분이면 족히 대연평에 이를 수 있다. 시멘트 다리를 건너다보면 왼쪽으로 펼쳐진 그림같은 섬이 보이는데, 이것이 꾸지섬(구지섬)이다. 가끔 여기에는 두루미가 날아와 새하얗게 섬을 뒤덮기도 해 몇몇 어부들은 학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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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참수리호에 풍어제를 지낸 꽃게잡이배가 뱃고사 음식을 전달하고 있다.

당섬과 꾸지섬 사이는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이 갯벌은 온통 자연산 굴밭이다. 하여 물때에 맞춰 이 곳에 나오면 연평도 사람들이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혹은 손수레를 끌고 삼삼오오 갯벌로 나가는 그림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갯일 나가는 풍경이야 다른 섬과 무에 그리 다를까마는 이 곳의 풍경은 소연평, 당섬, 꾸지섬 등의 절경으로 둘러싸인 데다 뻘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갯것을 먹으려는 갈매기떼의 군무가 장관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여느 갯벌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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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섬과 꾸지섬 사이는 썰물 때가 되면 거대한 갯벌이자 자연산 굴밭이 된다.

북한 해주 땅이 코앞에 펼쳐진 섬

시멘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난 시멘트길을 30여 분 정도 걸어가면 조기역사관이 자리한 관광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해벽 위에 우뚝 선 조깃배 동상을 지나 조기역사관으로 들어서면 그 옛날 조기 파시 시절의 사진과 함께 여러 조기 자료를 만날 수 있다. 관광전망대는 바로 조기역사관 옥상이다. 여기서 보면 연평도 북서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멋진 해벽은 물론 서남쪽에 뜬 소연평도와 꾸지섬도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광전망대에서는 북한 땅인 황해도 해주 땅이 코앞처럼 펼쳐져 있어 해주를 떠난 실향민에게는 그야말로 고향전망대 노릇을 한다. 바로 저 앞바다가 1999년 연평해전이 일어났던 교전지이며, 지금도 긴장감이 감도는 NLL(북방한계선) 구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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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섬에서 꾸지 섬으로 연결된 썰물 때의 갯벌길.

연평도에서는 정월 대보름께 열리는 풍어제가 끝나면 꽃게잡이 배들의 선주들이 연평도 바다를 지켜주는 해군 전함을 방문해 뱃고사 음식을 전달하는 의식이 있다. 내가 풍어제를 구경갔을 때에도 고사를 지낸 배들이 과거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참수리호에 다가가 시루떡이며 백설기, 과일과 고기 등을 내려놓고 오는 풍경을 직접 본 적이 있다. 바다에 떠 있는 해병의 수에 비하면 음식이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연평도 어부의 정성이고 마음인 것이다. 지금이야 연평도가 꽃게잡이로 유명하지만, 오래 전에는 꽃게보다 조기가 이곳 연평도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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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관광전망대에서 바라본 NLL 지역과 북한 땅 해주 지역. 바다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이 바로 해주 땅이다.

조기파시가 한창이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연평도의 풍어제는 한달씩 굿판을 펼치는 대동굿을 열 정도로 큰 판이었고, 1968년까지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파시가 열리던 ‘파시의 수도’나 다름없었다. 당시 연평도에는 조기를 쫒는 어부들과 어부를 쫒는 객주와 색시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왁자하고 발 들일 틈 없이 성대한 파시를 이루었다. 그 때는 대연평뿐만 소연평 앞바다까지 배가 빼곡하게 떠서 배 위로만 걸어 소연평까지 걸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의 조기 잡던 어부들도 연평도를 흔히 서울 다음이라 했다. 그만큼 연평도가 번창했고, 조기파시가 성황을 이루었다는 얘기다. ‘똥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도 연평도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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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조기 파시가 한창이던 시절의 연평도 풍경. 조기잡이배들이 꽉 들어찼다.

지난 날 조기 파시의 수도

“하이고, 그 때는 왜 뱃사람들이 해변에 내리잖아, 그래 급할 때는 해변에서 똥을 누는데, 종이는 없고 대신 돈으로 뒤를 닦고 버렸거든. 그러니 여기 개들이 그 돈을 물고 다닌거야. 그 때는 남한 일대 조깃배는 다 왔어요. 오죽하면 조금사흘 벌어서 1년 먹고 산다는 말도 있었어. 그 때 보면 수협 앞에 돈을 넣은 마대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사람들이 그 때는 순진해서 그게 돈자루인지도 몰랐지. 그러니 집에다 엮어놓은 조기 두름은 훔쳐가는데, 마대자루는 온전했지 뭐. 50~60년대만 해도 여기에 술집 색시가 1000명 정도 들어왔어. 집은 다 초가집인데, 색시는 한 집에 다섯 명, 열 명 짝 깔렸었어. 그러니 조기 잡는 어부들은 여기를 작은 서울이라 불렀지. 조기 파시 시절 조기 어망이 떠오를 때 보면 온통 황금빛이야. 줄을 잡아 올리면 금이 반짝반짝 하는 것처럼 조기비늘에서 금빛이 났으니까.” 인천에서 시집와 40년 넘게 연평도에서 살았다는 이기숙 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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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섬에서 바라본 연평도 항구 풍경.

과거에는 연평도 조기를 조기 중의 최고로 꼽았다. 연평도 조기 중에서도 3~4월 첫 행선 때 잡은 조기를 ‘오사리’ 조기라 하여 최고로 쳤다. 이 오사리 조기는 맛도 맛이지만, 제사 때만 올리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과거 조기잡이는 빠를 때는 2월 말, 대개 3월쯤에 행선을 하여 달포쯤 파시를 이루었다. 어장은 칠산바다에서부터 연평도 안목까지 이어졌다. 일찍 행선한 배는 칠산바다에서부터 조기를 따라 곡우 무렵인 4월에는 연평도로 올라왔다. 하여 연평도에서의 조기 파시는 4~5월에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조기잡이배는 돛대를 단 풍선배였는데, 큰배는 100동(1동에 1천 마리)까지도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씨알이 많던 조기도 조깃배가 많아지고 저인망 어선이 생겨나 조기가 올라오는 길목에서 싹쓸이를 해대면서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더더욱 중국배들까지 우리 바다를 침범하면서 그렇게 많던 조기가 이제는 연평도에서조차 희귀한 어종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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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의 연평도 조기역사관 풍경.

애당초 연평도에서의 조기잡이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1636)이 일어난 뒤 임경업 장군(1594~1646, 충주 출생)은 배를 타고 청나라로 향하던 중 연평도에 들르게 되었다. 식량이 모자라던 차에 장군은 연평도 안목에 이르러 가시나무를 바다에 죽 꽂아(어살법) 조기를 잡아올렸는데,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 옛날 임 장군이 선보인 어살법에 의한 조기잡이는 1960년대까지도 안목에서 성행하였고, 오랜 동안 많은 조기를 잡았다고 한다. 연평도의 충민사는 바로 그런 임경업 장군을 기리고 오래오래 숭배하고자 조선 후기에 세운 사당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장군당은 소실되고 말았고, 6.25가 끝난 뒤 1954년에 연평도 주민들은 새로 당을 지어 임 장군을 모셨다.

눈물의 연평도

50~60년대만 해도 인천에서 연평도까지는 뱃길로 1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새벽에 배를 타면 저녁 늦게서야 도착했다는 것이다. 인천까지 워낙에 먼 뱃길이다보니,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연평도는 해주가 생활권이었으며, 시장도 해주로 다녔다. 여기서 해주까지는 뱃길로 30분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실 연평도 주민의 70퍼센트 정도가 황해도가 고향이며, 6.25때 피난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조기파시가 한창일 무렵 연평도를 눈물바다로 만든 사건도 있었다. 이른바 ‘눈물의 연평도’라 불리는 이 때의 사고는 1959년 여름에 불어닥친 사라호 태풍이 주범이었다. “갑자기 태풍이 불어가꼬 그 많던 풍선배가 등대 안으로 못들어오고 말도 못하게 이북으로 떠밀려 막 넘어가고, 부서진 거야. 군인들도 그 때는 보초 서면서 뻐히 볼 뿐이지, 태풍이 그래 부는데 뭐. 마을은 쑥대밭 되고, 시신들 막 해변으로 밀려오고 그런 난리가 없었어. 그래 눈물의 연평도라 하잖아. 그래 어떤 사람은 임 장군님을 잘 못 모셔 그렇다고, 정한수 떠놓고 빌고, 세상 없어도 임 장군님만큼은 잘 모셔야 한다고, 지금까지 이래 모시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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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항구에 정박해 있는 꽃게잡이배들.

한창 잘 나가던 시절만 해도 연평도에는 1000여 명의 술집 색시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연평도에 사는 주민을 다 합쳐도 1000여 명이 되지 않는다. 조기파시가 끝나고, 꽃게잡이도 시원찮게 되면서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육지로 뱃머리를 돌렸기 때문이다. 현재 연평도에는 소연평에 단 한 척만이 그 옛날 조기잡이배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나머지 50여 척의 배는 모두 꽃게잡이배다. “꽃게도 많이 날 때는 길바닥에 막 꽃게가 밟힐 정도로 많이 잡았어. 중국배가 안 들어왔으면 지금도 꽃게가 그렇게 많겠지. 남북한 경계인 NLL 지역에 꽃게가 많이 새끼 낳고 그러는데, 그걸 중국 어선들이 다 잡아가는 거야. 한번은 중국배가 저 NLL에 있는 모루섬까지 들어와서는 모닥불을 피웠다가 바람이 부니까 불이 난 거야. 섬이 다 탔어. 우리는 NLL에 한번 들어가 걸리면 벌금이 300만원, 두 번째는 700만원이야. 중국배들은 다 들어와 잡고, 우리는 못들어가고. 중국배가 하도 잡아가니 요즘에는 바다에 나가도 꽃게가 없어 이제.” 포구에서 만난 한 어부의 푸념이다.

*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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