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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8 운주사, 혁명의 꿈을 접다 10

운주사, 혁명의 꿈을 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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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혁명의 꿈을 접다


운주사 9층석탑. 운주사를 떠받치는 돛대탑이라고도 한다.

 

영귀산 8부 능선 공사바위에서 내려다보면 운주사의 땅모양은 길쭉한 배처럼 생겼다. 그 배 위에 제각각으로 들어선 천불천탑이 무수한 돛대처럼 솟아 있다. 그 옛날 도선국사가 이 바위에 걸터앉아 운주사를 설계하고, 천불천탑 대공사를 지휘했다는 말도 전해온다. 전설에 따르면 도선은 한반도의 지형이 배처럼 생겨서 산이 많은 동쪽에 비해 산이 적은 서쪽이 기울 것을 염려해 배의 중심에 해당하는 능주에 천개의 불상과 불탑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설화에서 이 천불천탑은 하룻밤 사이에 세워야 새 세상이 열리고, 천년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지만, 마지막 남은 와불을 일으키려는 순간, 새벽닭이 우는 바람에 모든 염원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불상을 일으키려는 순간 첫닭이 울어 천년 태평성대의 염원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운주사 와불. 와불님 언제까지 거기 누워 계실 건가요?

 

결국 어렵게 건조한 운주사라는 거대한 배 한 척은 마지막 돛대를 달지 못해 운행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설화는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황석영은 <장길산>에서 운주사를 천민과 농민의 해방구이자 새 세상의 염원을 담은 미래불(미륵불)의 세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너무 일찍 새벽 첫닭이 울었던 탓에 장길산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56억 7천만년 동안 잠자고 있던 미륵불을 일으켜세우려던 혁명가로서 장길산의 꿈도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관군에게 쫓겨 운주사로 들어온 백성들의 시체는 마치 천불천탑의 잔해처럼 천불산 계곡에 무수히 흩어지고 쓰러져 나뒹굴었다.


    그랬다네, 그들은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둔 돛배 한 척 가득히

    창칼에 상한 육체들을 실어나르며

    하루 낮과 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우려

    돌을 쪼개고 힘든 목도질 나섰다네

    하지만 원수같은 첫닭 우는 소리에

    제 어미 품에 깃들이지 못한 축생들

    얼굴이 으깨어지고 심장이 터져

    무더기로 떼죽음당해 갔다네


                -- 임동확, <첫닭 우는 소리> 중에서.

 


목이 잘려나간 돌부처. 몸뚱이는 지금쯤 후천 세상을 떠돌고 있을까.

 

광주가 고향이었던 임동확은 운주사를 “유일한 임시 망명정부”로 표현했고, “우린 잠시나마 그 숲에서 행복했었다”고 이야기한다. 꿈꾸던 낙원에 이르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꿈으로 인해 가슴 부풀던 시절엔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석영이 운주사를 <장길산>의 마지막 배경으로 삼은 것은 운주사 와불이 미륵불이고, 미륵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불이기 때문이다. 그 미래불은 언제 올지 모르는 미륵의 꿈처럼 그렇게 여전히 누워 있다. 운주사는 이루어지지 못한 꿈,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한 안타까운 상징으로써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운주사 바위 절벽 아래 모셔진 돌부처. 눈이라도 잠시 피하려는가.

 

소설가 황석영 외에도 고은, 정희성, 정호승, 함성호, 임동확, 윤제림, 이정록, 이종수 등의 시인들이 운주사와 천불천탑을 소재로 한 시를 써야만 했다. 그것은 대체로 안타깝고 슬픈 현실의 반영이었다. 그들에게 운주사는 초월의 출구였고, 은유의 궁극에 도달할 소우주였다. 함성호는 시집 <56억 7천만년의 고독>의 맨앞에 “천불천탑 세우기, 내 시쓰기는 그런 것이다”라고 털어놓았다. 내가 아는 한 그는 평생 첫닭이 울기 전까지 천시천작(千詩千作)의 업을 때려치울 수 없으리라. 오랜 세월 운주사는 통한과 미련, 기다림과 고독, 열망과 꿈이 버무려진 공간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운주사가 그런 공간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정호승, <풍경 달다> 전문.

 

운주사의 땅모양은 길쭉한 배처럼 생겼으며, 그 배 위에 제각각으로 들어선 천불천탑이 무수한 돛대처럼 솟아 있다.

 

정호승은 운주사를 더 이상 심각한 공간이나 이념적 이데아로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적인 사랑의 이미지를 운주사에서 가져왔다. 사실상 시대의 변화가 운주사에 대한 이미지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 옛날의 와불은 이제 더 이상 후천개벽의 상징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시인들은 이제 와불에게 주어진 미륵의 꿈, 새로운 세상, 민중의 열망같은 무거운 짐을 하나씩 벗겨내고 있다. 설령 그 짐을 다 내려놓지 못할지라도 와불은 좀더 친근한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폭설이 내린 운주사 풍경. 우주의 배 한척이 이곳에 닻을 내렸다.

 

오랜 동안 운주사는 문학작품 속에서나마 어두운 시대의 현실에서 민초를 구원하는 거대한 구명보트 노릇을 해왔다. 본래 운주사의 한자 표기가 구름이 머무는 ‘雲住寺’임에도 작품에서는 우주를 떠도는 배로써의 ‘運舟寺’라고 해야 그럴 듯했다. 그래야만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바람을 부리는 돛대가 되는 것이고, 배를 모는 선원이 되는 것이었다.

 


운주사에서는 맹감나무 열매도 소복하게 눈탑을 쌓는가.

 

운주사에 남은 석탑과 불상은 다른 절집과 달리 그 이름이 민간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9층석탑보다도 한발 앞서 운주사의 맨앞에 자리한 거지탑이며, 와불(부부불) 가는 길에 만나는 머슴불이며, 항아리탑과 애기불도 그렇다. 그 많던 석불과 석탑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어 오늘날에는 겨우 석탑 17기, 석불 80여 기만 남았을 뿐이다. 절집은 망가지고 천불천탑은 쇠락했다. 운주사는 이제 오랜 민중의 열망과 혁명의 꿈을 접고, 조용히 잠들어 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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