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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눈덮인 사막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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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눈 덮인 사막에 오르다




 

‘몽골의 봄 날씨는 하느님도 모른다’는 말을 실감한다.
아침에는 흐리고 비가 오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더니
황사바람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분다.
그리고 다시 늦은 저녁에는 하늘이 새까맣게 돌변해 눈발을 퍼부어댄다.
내가 바얀고비에 도착한 것은 황사바람이 거센 초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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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내려 사구를 덮은 바얀고비 정상에서 바라본 순백의 풍경.

사막의 게르 캠프에 배낭을 풀고, 난로불에 몸을 녹인 뒤
게르 밖으로 나오자 조금씩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저녁에 그것도 사막에 내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게르 식당에 들러 밥은 먹는둥 마는둥
다른 일행과 섞여 나는 칭기스 보드카 한 병을 다 비우고, 옆 테이블의 술까지 얻어마셨다.
오늘은 보름 일정의 알타이 여행 마지막 날이었고,
내일이면 울란바토르에 당도해 있을 것이므로
오랜만에 취하도록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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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 사막. 사구 꼭대기에 선 그림자.

봄인데도 게르에서 잠을 자고 나면 몸이 동태처럼 얼어붙곤 한다.
잠들기 전 난로에 장작을 잔뜩 집어넣고 잔다 해도
새벽 3시 반쯤이면 난로가 꺼지고, 불쏘시개도 워낙 부족해
어쩔 수 없이 게르에서는 새벽 추위를 몸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
침낭에다 이불을 덮고 오리털 점퍼까지 껴입고 자는데도
몽골의 봄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든다.
물론 이 추위는 몽골의 유목민들에게는 말 그대로 따뜻한 봄 날씨이고,
난로불이 없어도 견딜 수 있는 추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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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 바얀고비 풍경. 남고비와 달리 중간중간 나무도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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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동태가 다된 몸으로 게르 밖으로 나오자
사막과 초원이 온통 순백의 세상으로 변해 있다.
게르 캠프 멀찍이 풀어놓은 말들은 눈밭을 뒤져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한 새싹을 뜯어먹느라 분주하다.
새벽 6시.
벌써 아침 해가 떠서 사막의 눈을 바라보는 내 눈이 눈부시다.
나는 게르 캠프를 벗어나 무작정 사막의 사구를 향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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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구 정상을 올라온 내 발자국(위). 사막 초입에서 바라본 바얀고비 눈 덮인 사구(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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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바로 보이는 사구를 무려 30분 넘게 걸어가 만난다.
몽골에서는 평소의 원근감을 믿으면 낭패를 본다.
시야가 트여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도 가다보면 한참이 걸린다.
바얀고비는 ‘풍부한 모래땅’이란 뜻이다.
‘고비’는 모래땅 혹은 사막을 뜻하고, ‘바얀’은 ‘풍부한’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몽골에서 고비는 도처에 있다.
나몽고비, 조올칭고비, 만달고비, 우부르고비, 바얀고비 등등.
그러므로 몽골에서 고비를 사막이라 부르는 것은 ‘사막사막’이라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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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덮인 눈과 눈 결정체가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위). 눈에 덮인 사구의 모래물결 무늬(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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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내려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바얀고비의 사구는 평소의 황토색 사구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월세계에 첫발을 내딛듯 나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사막에 발자국을 찍으며 간다.
사구에 쌓인 눈도 헐겁고, 모래도 헐겁다.
모든 게 헐거워서 발이 푹푹 빠진다.
빠진 발자국마다 눈 속에 숨어있던 모래가 드러난다.
이 아침 나 말고는 아무도 사구의 둔덕에 오른 이가 없다.
사구에서 게르 캠프까지 내가 걸어온 자국만이 길게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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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초입에서 만난 말인지 염소인지 모를 동물의 뼈(위). 눈이 녹기 시작하는 사막에 이른 아침부터 양치기가 염소를 몰고 있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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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푸짐하게 내리지 않은 탓인지
사구의 모래물결무늬 그대로 눈물결 무늬를 이루었다.
어떤 둔덕은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처럼 휘어졌고,
어떤 경사면은 칼로 잘라낸 것처럼 날이 섰다.
그러나 그것의 날카로움은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굽이친다.
밤새 내린 눈은 사구를 다 뒤덮었지만,
사구의 굴곡과 곡선만큼은 덮지 못했다.
사구에 쌓인 눈의 결정체는 아침 햇살을 받아 유리가루처럼 반짝인다.
멀리서 보면 눈은 그저 흰색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햇살 속에 갖가지 빛깔로 빛난다.
그것은 곧 사라질 것이므로 더욱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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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얀고비 게르 캠프로 가는 길.

눈 내린 사막의 황홀경에 빠져 거의 1시간을 사막에 머물렀다.
바얀고비는 2년 전 가보았던 남고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사막이다.
어떤 사막의 능선에서는 키 작은 나무가 자라고,
사막을 내려선 구릉에도 성기게 자란 풀밭에 자작나무가 듬성듬성 솟아 있다.
사구의 규모는 남고비보다 작지만,
방대한 벌판을 따라 곳곳에 사구가 펼쳐져 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사구의 눈은 서둘러 녹아내린다.
내가 게르 캠프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돌아보자
사구의 눈은 이미 다 녹아버렸다.
순식간에 하얀 사막이 황토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눈이 녹은 벌판으로 양치기는 벌써 염소와 양떼를 몰고 사구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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