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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20 월야의 고양이 산책 19

월야의 고양이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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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의 고양이 산책

 


 

하루의 열기가 식고 달이 뜰 무렵이면 어김없이 나는 집을 나선다. 밤 마실 같은 이 산책을 나는 ‘월야의 고양이 산책’이라 불렀고, 이제는 거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아내가 임신을 한 뒤로는 더더욱 산책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아내는 순산을 위해서라면 산책이 아니라 암벽이라도 오를 기세였다. 우리의 산책 코스는 마을에서 개울길로 내려가 굴다리를 지나서 역전을 돌아 큰길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1시간 가량의 길이었다. 물론 내가 그리는 이 산책 코스의 개념은 약간 달랐다. 달타냥과 깜찍이네 식구들(7마리)-도화댁 고양이(4마리)-삼순이네(3마리)-단발머리(1마리)-역전 고양이(어미와 5마리 아기고양이)를 차례로 만나는 코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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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주로 만나는 역전 고양이 중 한 마리가 담장에 앉아 있다. 낮에 만난 것은 두어 번밖에는 되지 않는다.

달타냥과 깜찍이네 식구, 단발머리를 제외한 다른 고양이들은 블로그에 한번도 소개한 적이 없는 고양이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녀석들은 모두 밤에만 만나는 야행성 고양이들이다. 당연히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어쩌다 한번씩 벌건 대낮에 녀석들을 보면 낯설기까지 하다. 물론 21마리나 되는 녀석들을 항상 다 만나는 것은 아니어서 매일 만나는 녀석들의 수는 들쭉날쭉이다. 그래도 산책을 나갈 때마다 양쪽의 바지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사료를 챙겨들고 나간다. 시골이다 보니 밤이면 길이 어두워 플래시도 항상 챙겨들고 나선다. 한손에는 플래시, 바지 주머니에는 고양이 사료. 옆에는 만삭인 아내. 다행히 아내는 나보다 더 고양이를 좋아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만난 고양이에게 사료를 부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문제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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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고양이의 구성원은 꼬리가 짧은 고등어 어미와 세 마리의 삼색이, 두 마리의 고등어로 되어 있다. 담장 아래서 젖을 먹이고 있는 역전 고양이 어미.

한번은 플래시를 비춰 역전 고양이 6마리가 장독대와 담장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흘끔흘끔 우리를 수상하게 훑어보는 거였다. 아내는 내 소매를 잡아끌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꼭 부부 절도단 같아!” 하긴 이 한밤중에 플래시로 남의 집을 살피고 있으니, 남이 보면 영락없는 부부 절도단이라 오해를 할만도 하다. 심지어 내가 개울길을 벗어나 방죽에 사료를 부어줄 때면 아내는 차가 오나, 사람이 오나, 망까지 봐주는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한밤중에 눈치를 보며 고양이 사료를 줘야 하나 고민도 해보지만, 늘 같은 시간에 차 밑에 얌전하게 앉아서 사료를 기다리는 고양이를 보고 있자면 생각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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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나와 무언가를 뒤지고 있는 역전 고양이 삼색이 두 마리.

사실 처음부터 내가 사료를 챙겨들고 산책에 나선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내와 시골의 밤공기나 쐬자고 집을 나섰다. 지난 해 봄이었을 거다. 마을길을 돌아 개울길로 나섰는데, 모내기한 논에서 우렁차게 맹꽁이가 울어댔다. “어릴 때 듣던 맹꽁이 소리야” 하면서 센티멘털한 아내는 훌쩍거렸다. 여름에는 산책하는 길에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날아다녔는데, 아내는 또 반딧불이가 날아다닌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달밤에 개울에서 찰방찰방 소리가 들려 플래시를 비춰보니 고라니 어미와 새끼가 나란히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미는 놀라서 먼저 벼가 웃자란 논으로 허겁지겁 도망쳤고, 아직 어린 새끼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겨우 방죽을 뛰어올라 논두렁으로 달아났다.

그저 시골의 맑은 공기와 자연을 누리자고 시작한 산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고양이가 눈에 밟혔다. 지난 해 겨울이었을 거다. 마을 공터 차 밑에 어미 고양이와 다섯 마리의 아기고양이가 오종종 앉아 있었다. 날은 추운데, 아기고양이들은 배고프다고 앙칼지게 울어댔다. 그 울음소리가 며칠 동안이나 귓전에 맴돌았다. 이 고양이들은 그날 이후 영영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도화댁이라고 이름붙인 노랑이는 쓰레기더미에서 누군가 버린 옥수수에 달라붙은 알갱이를 핥아먹고 있었고, 어쩌다 가끔 만나는 교회냥이는 달밤에 쓰레기봉투에 올라앉아 열심히 쓰레기를 헤치고 있었다. 역전 고양이 어미가 식당 앞에서 음식 쓰레기를 뒤지다 식당 아주머니에게 된통 혼나는 것도 보았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고양이들에게 전단지라도 돌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에 오면 얼마든지 배불리 사료를 먹을 수 있다’고. 낮에 만나서 사진 찍는 고양이들에게는 사료를 주면서 밤에 만나는 녀석들은 그냥 모른 척 한다는 것도 양심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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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개울길 방죽에서 만나는 도화댁. 세 마리 노랑이 새끼의 어미다. 낮에 딱 한번 본 적이 있다.

결국 지난 해 겨울부터 나는 산책을 나갈 때마다 주머니가 허락하는 만큼의 사료를 챙겨나가기 시작했다. 낮에도 자주 만나는 달타냥이야 그동안 몇 번에 걸쳐 대용량 사료를 아예 할머니에게 전달했으니, 따로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 깜찍이도 달타냥에게 동냥을 할 터이고, 깜찍이가 낳은 다섯 마리의 아기고양이 또한 요즘 매일같이 내가 사료를 배달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가장 걱정되는 녀석들은 아기고양이 식구가 많은 도화댁과 역전냥이네다. 도화댁이란 이름은 녀석이 영역으로 삼은 집 앞에 커다란 홍도화가 한 그루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그동안 고양이 산책에서 가장 많이 만났고, 가장 오래 만난 녀석이기도 하다.

도화댁은 전형적인 노랑이로 라임색 눈을 가지고 있다. 지난 초여름에 새끼를 낳았는데, 현재 세 마리의 아기고양이(세 마리 다 노랑이)가 있다. 그 중에 아기고양이 한 녀석은 매일 밤 차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의 사료배달을 기다리곤 한다. 멀리서 나의 플래시 불빛이 비치면 녀석은 다른 곳에 있다가도 방죽 다리 차 밑으로 달려와 얌전하게 웅크리고 있다. 내가 방죽에다 사료를 수북이 부어놓으면 녀석은 가장 먼저 달려와 오독오독 사료를 씹어먹는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내가 사료를 다 부어놓기도 전에 달려와 내 발밑에서 왜 이리 행동이 굼뜨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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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를 돌아가는 도화댁의 뒷모습.

도화댁 가족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어느 보름달이 뜬 날의 산책에서였다. 아내와 산책을 거의 끝내고 홍도나무 옆을 지나고 있는데,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서 도화댁이 세 마리의 아기고양이와 함께 그루밍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야말로 꼬리를 쓰다듬는 고양이의 달밤이었다. 역전냥이를 만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아내와 함께 역전 큰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조막만한 아기고양이 한 마리가 달리는 자동차 앞을 가로질러 숲으로 뛰어들어가는 거였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숲 입구에 사료를 약간 뿌려주자 녀석은 순식간에 그것을 먹어치웠다. 그날 이후 자주 녀석들의 식구와 대면했다. 밤중이라 확실히 구분은 되지 않았지만, 삼색이 세 마리에 고등어가 두 마리, 어미는 고등어로 보였다.

한번은 자정 무렵에 녀석들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사진으로 찍어두지 못한 게 후회스러울 광경이었다. 그날도 보름달이 훤한 밤이었고, 아기고양이 다섯 마리와 어미고양이가 보도에 나앉아 저마다의 자세로 자유롭게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하천에서 올라온 안개가 살짝 거리를 뒤덮었고, 그 안개 속에서 가로등은 수은등처럼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아기고양이 중 한 마리는 멀리서 지켜보는 나를 의식한듯 달빛과 안개 속에서 한창 발라당을 했다. 달빛과 안개 속의 발라당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생경한 광경이었다. 그루밍 하는 다섯 마리의 고양이와 발라당 하는 한 마리의 고양이. 그것도 자정 무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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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의 고양이 산책에서 만나는 어미 삼색이. 두 마리의 턱시도 새끼가 가끔 어미와 동행한다. 이 녀석을 낮에 만난 건 처음이다.

역전냥이와 도화댁 가족을 제외한 다른 고양이들은 매번 만날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2~3일에 한번 마주칠 때도 있었고, 일주일에 한번 만날 때도 있었다. 그 중 삼순이는 최근 두 마리의 턱시도 새끼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녀석 경계가 하도 심해서 10미터 정도만 가까이 접근해도 줄행랑을 놓고 만다. 경계심 심하기로는 단발머리도 마찬가지다. 녀석은 언젠가 우리집에 밥 동냥을 왔다가 바람이에게 쫓겨난 적도 있는데, 그 이후로는 개울길 방죽에서만 이따금 만날 뿐이다. 사실 도심의 길고양이에 비해 야생성이 강한 시골의 고양이는 상당수가 야행성이다. 같은 시골이라 해도 여울이나 당돌이, 가만이, 대모가 사는 이웃마을에서는 낮에도 언제든지 고양이를 만날 수 있는 반면, 달타냥과 전원고양이가 사는 우리 마을에서는 밤중에 더 많은 고양이를 만난다.

날마다 계속되는 월야의 고양이 산책.
밤고양이들아, 이 한 움큼의 사료와 연민밖에는 너에게 줄 것이 없구나.
식은 거라도 맛나게 먹어다오.
주변에 밥 굶는 아이가 있다면 데려와도 괜찮다.
우리집 마당에 무제한 급식소가 있다는 사실도 널리널리 알려다오.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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