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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의 <소설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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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의 <소설과 인생> 
- 오래전 녹취 기록해 두었던 박완서 선생의 <소설과 인생> 강연록을 다시 올립니다.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 박완서의 ‘소설과 인생’


오늘 강연 제목은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까 보통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나 소설가로 살아온 세월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제목은 여러분들을 위한 제목이 아니라 제가 자신에게 내 반생, 일생을 돌아보는 의미에서 붙인 제목이에요.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이었던가 생각하면 여러 가지 신변 정리를 많이 하게 돼요. 제가 소설로 문단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독자에게 무얼 주었는가라기보다도 나 자신에게 소설이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잠 안 오는 밤이면 많이 생각합니다.


우선 제가 소설로 인해서 받은 이익은 많죠. 모든 것에서 물러날 나이인 일흔이라는 나이를 넘었는데도 모든 여성들이 바라는 일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제가 감당 못할 정도의 일이 제 앞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죠. 내가 추구하는 것을 거의 다 가진 게 아닌가 싶어요. 제 얘기를 들으러 이렇게 와주실 정도로 어느 정도 작가로서의 명예도 가졌습니다. 또 돈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만한 부도 가졌습니다. 그 부라는 것을 요즘 말하는 갑부들하고 비교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워낙 욕망이 작습니다. 원하는 게 그렇게 많지 않아요.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먹는 것도 조금 먹습니다. 다만 노후를 걱정 안해도 될 만큼 넉넉하게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만큼이면 충분한 부를 가졌다고 생각해요. 정말 부자한테는 하찮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금의 제 작은 욕망과 절제된 생활로는 다 못쓰고 죽을 것만큼 갖고 있습니다. 제가 몹쓸 병에 걸린다거나 치매에 걸리면 어느 정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게 돌봄을 받을 정도는 갖고 있으니까 저는 대단한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40세 늦깎이로 등단하기 전에도 나는 행복했다

 

저는 늦게 등단을 했는데, 40세에 등단을 했습니다. 제가 작가가 되기 전까지 생활은 무의미했느냐 하면, 그때도 사실 저는 행복했어요. 어쩌면 제가 작가생활을 나이 먹은 후까지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40세까지 제가 보통여자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도 보통여자로서의 경험과 삶을 파먹고 있는 거예요. 특히 농촌에서 태어나고 서울로 올라온 20세까지 농촌에서 지낸 경험이 그래요. 지역적인 고향이라기보다 제가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고향으로서 고향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인간성 속에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다면 죄다 농촌 공동체에서 얻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여기 오면서도 느꼈지만 논 빛깔이 지금 너무 좋아요. 이럴 때도 좋지만 여름에 왜 한없이 걸어도 파란, 그런 비단 같은 모양은 말할 수 없이 저한테는 절절한 빛깔이에요. 그건 아마 우리가 쌀을 주식으로 삼기 때문일 거예요. 쌀이 왜 그렇게 좋았던가…. 6.25 때라던가 일제 말기, 쌀이 부족하고 궁핍했을 때 우리 민족이 굶어죽는 사람 없이 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우리가 쌀 문화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만일 빵을 먹고 살았더라면 빵이라는 것은 뚝 잘라주면 자리가 나잖아요. 제가 농촌에서 자라면서 배운 쌀과 물에 대한 공경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물이 많은 고장이었는데도 그렇게 물을 아꼈던 데는 물을 긷는 며느리에 대한 배려였던 것 같아요. 게다가 쌀 한톨이라도 버렸을 때는 하늘 무섭다는 말을 할 정도였어요. 쌀은 하늘이었던 거죠.

 

그 쌀 때문에 우리가 6.25 때도 그렇고 일제 말기에도 살아남았던 것을 생각하면, 쌀은 나눠 먹으라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구든지 지나가다가 들어오면 우선 밥 먹고 가라고 불러 앉히잖아요. 밥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늘거(늘려) 먹을 수 있어요. 어려울 때는 잡곡을 섞어 먹고 그래도 안되면 물에 말고, 죽을 쑤고 한없이 늘거 먹을 수 있는 게 쌀인 것 같아요. 그 때는 그런 공동체 나눔이 살아 있고 혈육간에, 또 이웃간에 정이 있었어요. 항상 먹을 적에 이웃을 배려합니다. 화수분이라는 말이 있지만, 쌀을 볼 때면 저는 쌀 자체가 화수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셋이 먹을 것을 잘하면 열 명도 먹을 수 있잖아요.

 

쌀과 어머니를 연관지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개성 사람이었는데, 6.25때 피난민들이 우리집에를 들러가는 수가 많았어요. 그러면 덮어놓고 어머니는 먹고 가라고 붙드는 거예요. 우린 넉넉하다, 그러면서. 저는 올케하고 부엌에서 뭘 하고 그럴 때 우리 어머니가 우린 넉넉하다면서 붙들면 너무 싫었어요. 가을에 수제비를 만들면 밀가루가 얼마 없으니까, 우거지만 더 넣는 거예요. 그러면 손님한테는 하얀 밥을 많이 넣고 우리는 시커먼 우거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밥, 쌀에서 배운 것이 아닌가 싶어요. 먹을 것은 나눠야 한다는….

 

어려움과 곤경을 넘길 적에 우리에게 쌀이 있었다는 게 너무 고맙게 여겨지고, 우리가 쌀문화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요. 그 문화를 배우면서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게 저에게 만일 조금이라도 좋은 구석이 있다면, 그런 농경문화에서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쌀을 중요시하는 것 중에는 쌀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나, 하는 것입니다. 모낼 때나 추수할 때나 혼자서는 절대로 못 짓는 것이 농사잖아요. 전에 여기 오면서 어떤 청년이 이앙기로 혼자 농사짓는 것을 보면서 ‘논농사라는 것이 저렇게 고독한 노동이 아니었는데' 싶더라구요. 옛날에는 여럿이 어울려서 모를 꽂고 그랬는데, 어떻게 저렇게 혼자서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혼자 커피도 시켜먹고, 자장면도 시켜먹고 그러겠구나 싶더라고요. 어쩌면 제가 옛날 얘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대 입학 첫해 6.25를 경험하다


저는 소설 쓰기 전에도 행복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라고 했는데, 아직 제가 농촌 이야기는 못썼지만, 소박하고 나눔의 정이 있던 세상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경험을 파먹고 그리움을 파먹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다가 제가 대학교 들어간 해에 6.25를 만났습니다. 그때 누가 고생 안한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제가 본 경험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6.25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같은 어머니의 자식이 인민군도 되고 국군도 되고 반동분자, 빨갱이도 됐습니다. 그래서 서로 같은 마을에서 주인, 상전이 계급으로도 갈라지고 같은 혈육끼리 잠깐 사이에 쏴 죽이는 동족상잔이라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그때 군인보다도 경찰이 무섭고, 경찰보다는 청년단이 더 무섭고 그랬어요. 서울이 몇 번씩 뒤바뀌는 상황에서, 국군이 들어오거나 인민군이 들어오고 하면 저쪽이나 이쪽에서나 스무살 처녀가 당해야 했던 수모, 인간 이하의 모욕이라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간 해에 6.25가 났어요. 저는 서울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때 저는 서울대학이면 굉장한 줄 알았어요. 그것도 여자애가 들어갔으니, 기고만장해서 나 외에는 누구도 없는 줄 알다가 별안간 나락으로 빠진 거죠.

 

인간이라기보다는 버러지처럼 기어야 했던 상황에서 제가 마음속까지 버러지가 안되고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내가 이것을 글로 쓰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이었죠. <레미제라블>을 보면 테나르디에 같은 악인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저 인간을 형상화해서 나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미워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그 시간과 상황을 기억하도록 했던 거죠. 스무살 먹은 처녀의 복수심이었고, 앙심이었던 거예요. 제가 그때를 잊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시기가 그렇게 지독했던 시기였어요.

 

그렇지만 복수심, 증오가 직접적인 글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그 시기를 넘기고 스물 셋에 결혼을 해서 아주 무사안일하고 평온한 생활이 계속되니까 복수심, 증오 같은 것은 다 가라앉더라구요. 제가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제게 바란 것은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일찍 과부가 되신 어머니가 바느질품을 팔아서 저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시면서 당시 어머니가 우러러 보는 직업을 시키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낙원 같은 시골을 벗어나서 별안간 서울 학교에다 넣었는데, 그것은 저한테 굉장히 힘든 경험이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저를 똑똑한 애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공부를 잘 못했어요. 하도 정성을 들이기는 했지만, 저는 경성학교는 엄두도 못내고 숙명을 갔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꿈이 하나 더 높아지셨어요. 어디서 들으셨는지, ‘공부만 잘하면 동경 유학을 시켜준다더라'고 하더라고요. 그것을 꿈으로 삼으셨으니까 거기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오락이랄까, 취미로 좋아하던 것이 문학이었죠. 아무튼 작가라는 것은 저에게 별로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결혼하고 편안하게 살게 됐는데, 그 시기, 아무것도 안하고 애만 낳고 기르던 시기도 저는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어떤 앙심, 복수심 때문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아이들을 기르고 하는 안온한 생활 속에 묻혀 졌죠. 그러다가 40세에 <나목>이라는 작품을 처음 쓰게 됐습니다. 거기에는 화가가 주인공인데, 처음에는 전기를 쓰려고 준비한 것이었어요. 박수근 화백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좀 거슬러 올라가는데, 좌우대립 속에 우리 오빠도 비참한 최후를 맞고 제가 가장이 됐습니다. 우리 올케, 어린 조카, 어머니, 저까지 다섯 식구를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제가 학교도 그만두고 집안식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어찌어찌하다가 미8군 피엑스(PX)에 취직을 하게 됐습니다.

 

잊을 수 없는 박수근 화백을 만나다

 

미8군 피엑스라는 데가 지금 서울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입니다. 그때는 전선이 의정부쪽에도 있고 해서 서울에서 취직할 만한 데라고는 없었어요. 그런데 피엑스를 중심으로 해서 남대문 일대는 담배, 쵸콜릿 같은 것이 돌고 했어요. 거기서 얼찐얼찐 하다가 피엑스에 취직이 됐어요. 당시 취직하기가 어렵다고도 할 수 있고, 쉽다고도 할 수 있는 게 여직원들이 물건을 빼돌려서 몰래 팔아먹고 하다가 들키면 내쫓기고 금새 충원을 하니까요. 그래서 결원이 생겨서 충원을 한다고 할 때 제가 대학생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됐어요. 그래서 취직을 그 곳에 했습니다.


피엑스 근처에는 거지들이 많았어요. 양가집 애들도 피엑스 근처의 거지로 나섰어요. 돈도 돈이지만 미군들한테 뭘 훔치려고 하는 애들도 있었죠. 피엑스 근처에서 화장도 짙게 하고 나오는 여자들한테는 그 애들이 돈 달라고 막 붙죠.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때죠. 제가 피엑스에 취직했다고 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저집 이제 좀 살게됐다'면서 우리집에 아부를 다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출근해 보니까 같이 충원된 사람들은 다들 좋은 데 가는데, 저는 제일 나중까지 남겨놨어요. 그러다가 간 데가 가장 구석지고 후줄근한 커튼이 쳐있는 곳으로 데려가요. 그곳이 어디냐 하면 초상화 그리는 곳입니다. 저에게 그림을 그리라는 게 아니고, 지나가는 고객이나 미군들을 꼬시는 역할을 하라는 겁니다.

 

저는 정말 기가 막히죠. 물건 파는 것이라면 정가가 다 있으니까 정가대로 돈 받고 거슬러주면 되는 거니까 벙어리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건 희뜩하게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그 사람을 그리게 하려면 굉장한 영어 실력이 있어도 힘든 일인데…. 제 고난의 날이 시작됐죠. 이것은 아무리 해도 못하겠는 거예요. 전임자가 맡아 논 그림은 팔려나가는데 저는 새로 그릴 수 있게 못만들고 하니까, 그림은 자꾸 줄어들죠. 그러니까 ‘아니 미스박은 목구멍에 거미줄 치는 것을 보려고 하느냐'면서 뒤에서들 난리를 쳐요.

 

그래서 저도 한달만 일하자. 한달만 있으면 월급을 받으니까요. 그래도 자꾸 뒤에서 뭐라고 하니까 미군을 꼬시는 눈치가 생겨요. 장교보다는 사병들에게 ‘여자친구 있냐' 물어보고 사진을 보여주면 초상화 그려서 보내주라, 그러면 여자 친구가 얼마나 좋아하겠느냐고 하면서 말을 걸었어요. 그런데 이 직장이 곤욕인 것은 물건 파는 것하고 달라서 그림이 맘에 들지 않으면 찾으러 와서 머리 색깔이 블론드다, 그레이다, 실버그레이다 하면서 그림은 잘못됐다 하고 따져요. 애걸을 해서 수정을 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완전히 다시 그리는 경우는 화가들에게 손해입니다. 스카프에 주로 그렸는데, 화가들로서는 스카프 값도 물어내야 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화가도 살아야 하고 나도 살아야하는 상부상조의 상황인데도 항상 상극하는 사이가 돼요. 저는 ‘왜 이렇게 그리느냐, 좀 잘 그려라'고 하고 화가들은 저에게 ‘애교도 부려서 좀 보내라. 화장도 하고 파마도 하고 다녀라. 여기가 대학인 줄 아냐'고 하죠.

 

제가 지금은 능히 그럴 수 있는데 그때는 나이 많은 화가들에게 아저씨나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씨'자를 붙여서 김씨, 이씨 부르면서 버릇없이 굴었어요. ‘사진은 기계가 하지만 이건 손으로 하는데 왜 예쁘게 못 그리느냐’ 하면서 그렇게 못되게 굴었어요. 어느 날, 저에게 수모를 받던 화가 한 사람이 두꺼운 화집을 하나 끼고 왔어요. 저는 속으로 같잖게 여겼죠. 그땐 모든 것이 짜증나고 신경질만 나고 세상 다 산 것 같을 때니까, ‘자기가 뭐라고 화집은 끼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 화가가 화집을 펼쳐 보여줬어요. 보니까 일제시대 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던 작품들을 모은 화집이에요. 그때만 해도 관전(官展)이지만 거기에 입선한 것은 대단하게 여겨졌는데, 거기에 있는 그림 하나가 자기가 그렸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박수근 화백입니다. 그 대단한 화가가 거기서 저에게 그런 수모를 받았던 거죠. 저는 그것이 저에게는 어떤 전기였습니다. 그 사람을 모델로 해서 소설을 쓴 것이 저에게 소설가로서의 변신의 계기가 됐습니다.

 

6달러짜리 초상화를 그리던 박수근

 

내가 가장 잘난 듯이 버르장머리 없이 굴었는데, 선전에 입선한 화가도 여기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중에는 우리 엄마가 그렇게 선망하는 여학교 선생님도 계셨고, 우리 학교 3학년 영문과 선배, 은행 다니던 선배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보니까 제가 제일 잘난 것이 아니더라고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살았던 거죠. 우리 남편도 거기서 만났어요. 남편 될 사람도 그 중에 다 있던 거죠. 내가 마음이 겸손해지고 그러니까 사람이 보이고 좋은 사람들도 알게 되고 하더라고요.

 

박수근 씨는 양구 출신입니다. 양구는 격전지였어요. 전선에서 온 군인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갓 뎀 양구'라고 할 정도였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양구 출신의 화가가 그곳에 앉아서 싸구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때 박수근 화백이 싸구려 인조 스카프에 그려서 받은 초상화 값이 6달러였습니다. 저는 그 분이 어렵게 살았다는 얘기,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소문으로만 듣다가 69년경에 유작전을 했는데, 이중섭 화가와 막상막하의 그림값을 받더라고요. 제가 유작전을 보고 나서 그렇게 속이 부글대는 거예요. 샘이 나서 부글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싸구려 그림을 그리고 가난하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니 그랬습니다. 그 사람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속이 상하더라고요.

 

제가 속물이라 그런지 ‘진정한 예술가는 죽고 나서 평가를 받는다'고 하는데, 저는 이왕이면 살아서 호강도 하고 이름도 알려지고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가족들도 그 사람 그림을 가진 게 없는데, 그 사람 그림값을 올려받으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약이 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언하고 싶더라고요. 그 분은 미술학교도 제대로 안 나온 분이라 제 생각에 다른 누구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양구에서 소학교만 나왔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 그분 그림 하나가 집값에 해당할 정도였으니까 살아서 좀 알아주지 죽으니까 이런가 싶어서 그분의 전기를 쓰고 싶어 했어요.


그걸 쓰면서 저 자신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전기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실제 생활, 사실을 가지고 써야 전기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일 끝나서 퇴근할 때 을지로입구까지 전차 타러 걸어가면서 나눈 얘기, 추울 때 오뎅 국물 마시면서 나눈 쓸쓸한 얘기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아는 게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억지로 이것 저것 꾸미려 들면 잘 안 써져요. 잘 써진 날은 다음날 다시 읽어보면 꾸며진 얘기인 거예요. 그래서 다 덜어내고 사실만 가지고 쓰려고 하면 또 너무 삭막하고 재미가 없어져요. 그러다가 제가 아, 이건 안되겠다. 이왕이면 쓸 때 기쁨도 느껴야겠고, 나도 그 사람 얘기 중에 제 얘기도 풀고 싶더라고요. 상상력도 보태자는 생각에 여태까지 쓴 것을 다 파기하고 소설로 쓰니까 너무 편하고, 쓰는 데 보람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목>에는 그분 모습도 나오지만, 저를 투사한 여주인공 얘기도 나오는 거죠.

 

박경리 선생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박완서 선생님. 이제 두분 다 고인이 되셨다.

 

증오와 복수심은 소설이 되지 않는다

 

긴 얘기를 했는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증오심, 복수심 이런 것이 소설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그때는 그런 것이 정열인 줄 알았는데, 역시 소설이 되는 것은 사랑이 아닌가 싶어요. 증오로 소설이 쓰여지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물론 증오만 가지고도 소설이 되기도 하죠. 그러나 그 경우는 반대되는 상황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증오로 나타나는 것이지, 순전히 나쁜 사람을 모두 미워하게 만들려는 증오로서 나오는 소설은 못 쓸 것 같아요. 되레 저에게 혜택을 주고 길러준 이 세상에 대한 보은의 의미로는 가능해도 증오, 복수로는 쓸 수 없어요. 인간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써야 글이 써집니다. 앙심, 복수심, 증오 이런 것이 소설을 쓰는 동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소설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일, 명예, 돈 등을 말씀 드렸는데, 또 하나, 정신의 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설 쓰기라고 생각해요. 몸의 체력과는 다른 정신의 탄력이죠. 글을 쓴다는 것은 굉장한 집중력을 요하는 일입니다.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일이 있으면 안되는 일이죠. 저는 처음에 글을 쓸 때 선배들이 ‘글 쓰는 일이란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작업'이라고 말을 했는데, 저는 첫 작품을 너무 기쁨을 가지고 빨리 썼기 때문에 뭐 저렇게까지 말하나 싶었어요. 그러나 이후 글을 쓰면서는 피보다 더한 것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진이 빠진다고 할까…. 내가 다 바스러지고 아무것도 안 남은 느낌이 나요.

 

어떤 때는 글 쓰는 일이 비참할 만큼 힘든 일이에요. 정신의 탄력을 잃지 않는 운동 같은 것이죠. 그런 것 때문에 아직도 제가 이 나이에도 감수성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요. 기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슬픈 것을 보고 슬픔을 느낄 수 있는 힘이 저는 젊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쓰기는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정신의 운동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얘기를 많이 했네요. 여러분들의 욕구에 맞추기보다는 저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 제 문학의 뿌리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말하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 녹취 및 정리/사진: 이용한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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