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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3 가고싶은 겨울 오지마을 추천5 11

가고싶은 겨울 오지마을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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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겨울 오지마을 추천 5



온통 폭설로 뒤덮인 불대마을의 흙집과 흙벽 건조실.


내가 국내의 오지마을을 찾아 떠돈 것은 12년 전부터이다. 10년 전 오지마을에 대한 책을 한권 내고도 모자라 계속해서 나는 산 깊은 두메와 골짜기에 들어박힌 외딴 마을과 길과 풍경을 찾아 떠돌았다. 그러는 동안 오지였던 곳이 관광지가 되거나 더 이상 오지마을로 부를 수 없는 풍경으로 변화되는 것을 나는 숱하게 보아 왔다. 그건 교통과 삶이 불편한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변화이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거름더미 위에 올라선 토종 수탂이 눈을 맞고 서 있다.


누군가 내게 오지마을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오지마을은 없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오지마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동일한 지층연대의 시간 속에서는 여전히 오지마을이 존재한다.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으로. 가령 그것은 과거의 오지마을보다 훨씬 가까운 시간의 지층 위에 놓여 있다. 여전히 나는 그곳으로 가는 타임머신의 단추를 누르고, 시간의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본다. 오래오래 그리운....어려운 시절의 행복한 기억들.


무주 불대마을: 흙집이 수두룩한 부처마을


간밤에 눈이 내려 멀리 보이는 민주지산과 삼도봉이 눈꽃으로 새하얗다. 반딧불 서식지로 알려진 남대천 줄기만이 지상의 숨구멍처럼 남아 구불구불 구천동과 대불천으로 갈라진다. 여기서 구천동으로 가지 않고 대불천으로 방향을 잡으면 민주지산과 삼도봉 자락에 깃든 대불리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이 곳을 처음 찾은 것은 10여 년 전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골 풍경 속에서 다행히 이 곳만은 ‘문명의 속도’에서 한 발 비켜서 있는 듯했고, 그런 점이 나를 다시 이 곳으로 이끌었다.



김이 서린 차안에서 차창을 통해 바라본 눈 내리는 불대마을 풍경.


본래 대불리는 석기봉에 있다는 마애불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대불리를 이루는 불대, 윗중고개, 아랫중고개, 불당골 등의 자연마을도 마찬가지 경우다. 대불리에서 산중으로 쑥 들어간 곳에 자리한 불대마을은 대부분의 집이 아직도 흙집이다. 흙집 건조실도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심심하고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마을. 이따금 수탉이 울고, 개가 짖고, 꿩 우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더더욱 눈이 내린 겨울이면 마을은 그림 속에 들어앉은 듯 평화로와서 지루하기까지 하다.


불당골에서 만난, 넉가래로 눈을 치우는 풍경. 그 옆에서 구경만 하는 강아지. 


불대마을을 지나쳐 만나는 내북동 또한 적막한 산중마을이다. 눈이 내려 더욱 고요한 마을에 소 털빛깔을 닮은 흙집이 드문드문 빛난다. 눈이 내린 산중마을에는 눈 치우는 소리가 상쾌하다. 어떤 이는 빗자루를 들고, 어떤 이는 넉가래를 들고 간밤에 내린 폭설을 치워낸다. 강아지도 할머니 옆에 바짝 붙어 낯선 이방인을 향해 캉캉 짖어댄다.


영동 불당골과 안정리: 도마령 아래 둥지튼 두메마을


영동 땅 용화에서 도마령으로 이어진 한적한 차도에는 차 한 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나와 눈과 눈 맞은 산과 들이 다 저녁의 흐릿한 풍경에 빠져 있다. 옛날 달밭이 많았다는 월전을 지나 안정리에 올라서자 눈발은 더욱 거세져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누군가 산자락에 숨겨놓은 듯한 마을. 마을로 이어진 길은 얼어붙은 냇가를 만나면서 급격한 비탈을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와서 더욱 비탈을 따라 층층이 들어선 집들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 위태로워 보이는 비탈길에 마을 사람 몇이 나와 눈을 치우고 있다.



폭설이 내린 가운데 안정리 산비탈길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어내고 있다.


“내가 영감 없이 사는 지가 56년이여. 6.25 사변 때 영감이 나가가지구 안죽도 안들어왔어요.” 마을에서 만난 82세의 이정순 할머니는 집 나간 할아버지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할아버지가 오실 길의 눈을 치우고 있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깨끗하게 요강을 부시고, 오늘처럼 눈이 오면 마당에서 큰길까지 눈을 쓸어 조붓한 길을 낸다. 56년을 할머니는 그러고 살았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안정리는 20여 채의 집이 고작이지만, 그 집들의 대부분이 흙집이고, 곳곳에 흙벽 건조실이 쓰러질 듯 눈밭에 서 있다. 어느 새 희디 흰 눈떼 사이로 여기저기 저녁 연기가 솟아오르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눈떼 가득한 마을을 내려와 불당골로 향한다.



눈과 어둠에 덮인 도마령 아랫자락의 산중마을 불당골의 저녁 풍경.


불당골은 도마령 아랫마을이다. 집이라고 해봐야 10여 채가 조금 넘는 외로운 마을. 아침부터 눈을 맞아 불당골의 집들은 온통 30센티미터쯤 눈을 이고 있다. 가을에는 이곳이 곶감을 많은 내는 곶감마을이지만, 이렇게 폭설 내린 뒤끝에는 그저 외롭고 적막한 산중마을이 된다.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어두운 산중마을에는 분간없이 눈떼만 푸슬푸슬 내린다. 영하 17도의 산중마을. 이 적막하고 외로운 풍경을 만나러 나는 왔다.


정선 안도전 마을: 설피와 디딜방아가 있는 토종마을


산굽이 옹숭깊은 마을에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른다.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내 눈이 금세 매워진다. 밥 짓는 연기, 혹은 어려웠던 시절의 행복한 기억! 세월은 종종 과거를 미화시킨다. 좋을 것도 없으면서 많은 이들이 그 때가 좋았지, 라고 털어놓는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시계를 갖게 되었지만, 어릴 때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 때는 어딘가를 꼭 가야할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를 꼭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도 지금처럼 힘들고 외롭지는 않았다. 한발씩 안도전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공연히 지난 시절의 아련한 풍경과 기억이 눈가에 맺힌다.



디딜방아가 있는 탁왈수 씨네 집에 안도전 마을 사람들이 마실을 왔다.


해발 1200미터가 모두 넘는 수병산, 고적대, 중봉산을 병풍처럼 아우른 채 둥지를 틀고 있는 마을, 안도전. 특이할 것도 없지만, 이 마을의 집들은 전부 양철 지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집의 벽체는 흙벽이 대부분이고, 돌담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이 대부분이다. 겨울이면 워낙에 눈이 많이 와서 안도전 사람들은 집집마다 눈밭에서 신는 설피를 두고 있다. 설피뿐만 아니라 우리 토종 스키라 할 수 있는 설매도 아직 몇몇 집에 남아 있으며, 아직도 디딜방아가 남아 있는 집도 두 집이나 되어서 명절이 가까워오면 거짓말처럼 떡방아 찧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안도전에서는 우리네 전통 스키인 설매 타는 풍경도 볼 수 있다.

 

사실 안도전 마을은 요즘 보기 드문 토종마을이다. 전형적인 산촌을 이루고 있는데다, 대부분의 집이 아직도 나무를 때고 살며, 디딜방아로 곡식도 찧고, 떡가루도 찧어낸다. 집집마다 설피를 두고 있으며, 설매를 두고 있는 집도 여러 집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안도전을 찾는 사람도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산속 깊이 박혀 있는 마을이지만, 계곡물이 맑고 주변 경치 또한 빼어나기 때문인데, 그런 까닭으로 중간중간 마을길은 말끔하게 포장이 되었다. 하긴 찾는 사람들이야 두메마을이 좋다지만, 사는 사람들이야 두메마을로 남고 싶지는 않을 터이다.


양양 면옥치 마을: 선글라스 노인이 사는 곳


법수치로 들어가는 길목인 어성전에서 길을 바꿔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남대천의 또다른 발원지로 알려진 면옥치가 나온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오지마을 신세를 면치 못했던 면옥치는 이제 길을 넓혀놓은 터라 눈이 내린 뒤에도 접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면옥치는 윗면옥치와 아래면옥치로 나눠지는데, 대부분의 집들은 아래면옥치 쪽에 있다. 아래면옥치에서 윗면옥치까지는 2킬로미터도 되지 않아 겨울 눈 트레킹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윗면옥치에서 처음 만나는 집은 질박하고 살가운 흙집이다. 이 흙집의 주인은 선글라스를 낀 노인(서종원)이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혼자 아궁이에 불을 때고, 당귀며 옥수수 농사도 짓고, 여덟 마리의 강아지까지 키운다.



폭설 내린 눈밭에 비스듬히 기울어가는 뒷간채. 기울어가는 농촌의 현실. 


그에 따르면 이 집은 지은 지가 50년이 넘었다고 한다. 봉당에는 설피가 신발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전시용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닥이 젖어 있는 것이 조금 전까지 신었던 것으로 보였다. 옛날 강원도나 경북의 두메에서는 한번 폭설이 내리고 나면 보름 넘게 길이 끊겨 싫든좋든 고립무원 생활을 할 때가 많았다. 이 때 산마을 사람들은 설피를 신고 마실을 다니거나 꿩사냥이며 토끼몰이를 했다. 그냥 다니면 눈에 푹푹 빠질 곳도 설피를 신으면 조금밖에는 빠지지 않아 이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설피를 신을 때는 신발을 신은 채로 덧신는데, 모양은 타원형으로 보통 신발의 서너 배나 크다. 바닥에는 발받침을 대거나 얼기설기 삼끈을 팽팽하게 매서 신발이 눈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윗면옥치에서 만난 눈을 뒤집어쓴 흙집 한 채. 이곳에 앞이 안보이는 서종원 노인이 혼자 산다.


할아버지와 얼마간 말동무를 끝내고 내가 마을 구경을 간다고 나서자 앞을 못 보는 노인도 주섬주섬 설피를 챙겨 신고 마실을 나섰다. 보아하니 봉당에 있던 지게 작대기로 그냥 지팡이를 삼았다. 여덟 마리의 강아지도 줄레줄레 노인을 따라나선다. 선글라스를 쓴 설피 노인과 여덟 마리의 강아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공연히 나는 마음 한켠이 짠해졌다.


평창 봉산리: 가장 외딴 오지마을


푹푹 빠지는 눈길을 달려 발왕재를 넘는다. 박지산(1391)과 발왕산(1458), 두루봉(1226미터) 등의 고봉에 둘러싸인 봉산리(봉두고니)는 그야말로 사람이 살것 같지 않은 두메마을이다. 발왕재 길은 비교적 험한 산세에 비해 나쁘지 않은 편이어서 승용차로도 넘을 수 있지만, 눈이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세찬 바람에 길의 우묵한 곳마다 눈이 수북히 쌓여 자칫 차를 눈 웅덩이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험한 눈길을 간신히 달려 봉산리에 이르자 개 짖는 소리 요란하다. 마을에서 처음 만난 권분하 할머니(74)와 최양순 할아버지(80)는 추운 날씨 속에서도 마당에 패놓은 장작들을 장작더미로 옮기고 있었다. 마당 왼편으로 보이는 돌비탈 산자락에는 빼곡하게 들어찬 토종 벌통이 온통 눈을 뒤집어썼다.



봉산리 최양순 할아버지가 장작을 옮기려 지게를 지고 나오고 있다.


한겨울 봉산리의 집들은 대부분이 빈집으로 남았다. 본래 10여 가구도 살지 않는 곳이지만, 그마저 농사철인 여름과 가을에 살던 사람들도 겨울이면 봉산리를 떠나기 일쑤다. 폭설이 내리고 나면 곧잘 고립마을이 되기 때문이다. 하여 봉산리에는 사람 사는 집보다 빈집이 더 많다. 봉산리의 집들은 대부분 ‘흙집’ 아니면 ‘투방집’이다. 투방집이란 통나무를 어긋어긋 치쌓아 흙고물로 벽막음을 한 귀틀집인데, 천정의 높이는 사람이 간신히 드나들 정도로 낮다.



눈에 덮인 봉산리의 외로운 투방집 한 채.


과거 투방집 지붕은 짚이나 겨릅을 해 얹었으나, 지금은 모두 함석을 얹어 놓았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수령 수백 년이 넘는 성황나무(전나무)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엔 성황나무만큼이나 신성한 당집이 모셔져 있다. 함석으로 대충 지붕을 가린 이 곳의 당집 안에는 여전히 신령한 서낭신의 신체를 모시고 있다. 신체 꾸밈은 명주실을 두 타래 늘어뜨리고, 창호지로 쓰이는 한지를 여러 묶음 늘여놓은 모양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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