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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09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 위도 띠뱃놀이 8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 위도 띠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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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고의 풍어제 ‘위도 띠뱃놀이’ 명맥 끊길 위기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위도 대리 선착장에서 띠배를 띄우기에 앞서 용왕제가 펼쳐지고 있다. 


설날을 하루 넘긴 음력 정월 초이틀, 부안 격포항에서 위도행 막배에 몸을 싣는다. 정월 초사흗날에 열리는 위도 띠뱃놀이를 보기 위해 6년만에 다시 위도로 간다. 뒤늦게 도착한 띠뱃놀이 전수관에서는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띠뱃놀이 기능보유자인 이종순 씨(74)와 내일 원당굿과 용왕굿을 펼칠 2명의 ‘당골네’가 띠뱃놀이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담을 나누고 있었다. 선지국에 밥을 말아 게눈 감추듯 저녁밥을 해치우자 방안에서는 곧바로 이종순 씨와 당골네의 ‘리허설’ 공연이 시작된다. 내일 열릴 굿판에서 부를 무가를 장고와 징소리에 맞춰보려는 것이었다. 소리가 시작되자 밖에 나갔던 구경꾼들이 하나둘 들어 방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진다.



띠뱃놀이에서 온갖 궂은 잎을 도맡아 하는 원화장.


2시간에 가까운 리허설이 끝나고서야 띠뱃놀이 전수관은 조용해졌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자정 무렵 원화장이 전수관 앞 우물에서 목욕재계를 했으나, 이제 이 의식은 생략된 듯하다. “옛날에넌 원화장 뿐만 아니라 화주와 부화장을 비롯해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목욕재계를 했어요. 목욕을 허고 나면 소변을 볼 띠도 손으로 못만지요. 나무를 깎아서 그것을 받치고 소변을 봤어요. 화장실을 대녀오면 목욕도 다시 해요.” 띠뱃놀이 기능보유자인 이종순 씨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뭍에서 장을 봐온 날부터 ‘제만집’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나 어릴 때는 전수관이 제만집인디, 이래 금줄을 치잖어요. 금줄을 친 이상 여자덜은 들어오덜 못해요. 여자가 임신헌 남자도 오덜 못허고, 타 부락 사람덜 아무도 못들어와요. 애럴 날 띠가 된 여자는 딴 마을로 가야 해요. 옛날에 한번 화주로 간 분이 메나리가 애기를 가진 줄 모르고 갔다가 용왕밥 느으러 갔다가 바다에 떨어져 죽다 살아난 적도 있어요. 음식을 만들 띠도 맛을 못봐요, 낙태한다고. 그래서 지금도 이 음식을 안 먹는 사람이 많어요. 전에는 화주도 돌아가민서 맡았어요. 어린 나이에도 생기만 맞으면 화주를 맡았어요. 화주를 맡으면 여기서 밥을 해먹고, 여기서 지내야 해요.”



원당굿에 앞서 축문을 외는 화주 장영수 씨.


이튿날 띠뱃놀이 준비는 새벽 댓바람부터 시작되었다. 전수관에서 잠을 청하던 나는 아침밥 준비를 위해 새벽에 들이닥친 마을 아주머니들로 인해 일찌감치 전수관을 나와 선착장으로 나섰다. 새벽 6시. 한시간쯤 희부윰한 선착장을 떠도니, 드디어 짙은 해무를 헤치고 해가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전수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아침 8시 30분. 아침 식사를 끝낸 마을 사람들이 드디어 풍물을 치며 띠뱃놀이의 서막을 울렸다. 띠뱃놀이의 차례는 원당굿, 주산돌기, 용왕제, 띠배 띄우기의 순으로 진행되지만, 지금은 마을을 한바퀴 돌며 풍물을 치는 주산돌기는 마을 들머리에 세운 장승에 예를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원화장이 제물을 짊어지고 원당에서 내려와 용왕제가 열리는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다.


원화장과 부화장이 지게에 제물을 짊어지고 앞장서자 그 뒤를 당골네(무당)와 화주, 선주들과 농악대가 장고와 쇠를 치면서 뒤따르고, 이어 오방기와 뱃기를 든 사람들이 뒤따라나선다. 그러나 띠뱃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부족해 바깥에서 구경온 사람들까지 총동원해 뱃기와 짐을 나른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원당이 있는 산 꼭대기까지는 몇 번이나 다리쉼을 해야 할 정도로 제법 가파른 비탈길이다. 더구나 눈이 수북히 쌓여 원당 오르는 길은 한발 올라서면 한발이 미끄러졌다. 그걸 미리 알고 마을 사람들은 새끼줄을 준비했다. 신발에 새끼줄을 친친 감으면 아이젠보다 가볍고 훌륭한 눈신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9시가 넘어서야 산꼭대기 원당에 도착했다. 띠뱃놀이 보존회장(전수자)인 장영수 씨는 서둘러 제상을 차리고, 기능보유자인 이종순 씨는 두껍게 꿴 돼지고기를 사방 벽에 내걸었으며, 당골은 명주천을 꺼내 매듭을 지어 벽에 내걸었다. 곧이어 전수자(화주)의 축문외기와 당골의 축수로 원당굿이 시작되었다.



대리 선착장에 만들어놓은 띠배. 용왕제가 끝나면 이 배를 바다 멀리 끌고 나가 띄어보낸다.


당 안에는 모두 일곱 신상을 모셔 두었는데, 각각의 모습은 산신상, 원당 마누라상, 본당 마누라상, 옥적 부인상, 아가씨상, 수문장상, 장군선왕상이다. 원당굿은 본래 일곱 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석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흥겹게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며, 술판을 벌인다. 당굿의 절정은 선주굿으로, 굿을 하는 동안 당골은 선주들에게 쌀을 집어 손바닥에 쥐어 준다. 이 때 선주는 쌀의 갯수가 짝수면 입안에 넣고, 홀수가 되면 버리고 다시 쌀을 받아 짝수가 되면 입안에 넣는데, 그 때마다 무당은 쌀을 받아든 선주가 어떤 신이 들었는지를 일러 준다. 예를 들어 “아무개, 장군선왕이야” 또는 “수문장상이야” 하는 식이다. 이렇게 일곱 석의 굿이 끝나면 다시 원화장을 앞세워 마을로 내려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원화장이 원당에서 내려올 때면 산 위에서부터 뒹굴면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가파른 비탈길에서 뒹굴어도 이제껏 단 한 명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신이 시키는 일이라 여기고 있다.



저녁 무렵 부안이 격포항에서 위도로 향하는 뱃길에서 바라본 풍경.


영하 9도에 폭풍이 몰아치고 눈발이 날리는 날씨에도 당굿은 무사히 끝나 마을로 내려오니, 어느덧 점심 때가 다 되었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이제 용왕굿과 띠배띄우기 의식이 기다리고 있다. 선착장에는 이미 띠배가 만들어져 용왕굿(용왕제)판을 지키고 있다. 이 띠배는 원당에서 굿이 벌어지는 동안 마을에 남은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데, 보통 길이는 3미터, 너비가 2미터 정도 된다. 이 띠배에는 반드시 다섯 개나 그 이상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태우며, 이는 선원 또는 시종을 뜻하는 것으로, 용왕신을 달래는 의미가 있다. 또한 이 허수아비는 각각 동서남북의 방위신과 중앙신을 뜻하기도 하는데, 각각의 허수아비에는 동방청룡장군, 남방주작장군, 중앙황제장군, 서방백호장군, 북방현무장군이라 쓴 깃발이 달려 있다.



띠배를 끌고 바다로 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배 위에서 신명나게 풍물을 치며 논다.


이에 대해 부안의 향토사학자 유종남 씨(70)는 “허수아비는 신을 달래는 의미요, 깃발은 소원성취를 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종순 씨는 띠배에 태우는 허수아비에 대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한 토막 들려 주었다. “옛날에 이복동 씨가 이장할 띤데, 60년댄가 그래요. 띠배를 해서 내보냈는데, 그 날 이장 꿈에 띠배가 도로 이 앞에 와 있드래요. 사람 한 사람을 안 싣고 와서 다시 왔다 그러면서. 실제로 새벽에 나가보니까 진짜 띠배가 이 앞에 와 있는데, 허수아비를 보니까 네 개밖엔 없드라는 거요. 그래 하나를 더 만들어 보낸 적이 있어요.”



드디어 모선이 띠배를 끌고 먼바다에 나가 띠배를 띄어보내면 위도 띠뱃놀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가운데 띠배를 앞에 두고 용왕제가 시작되었다. 먼저 무당이 바다를 향해 절을 하면, 마을 사람들이 따라서 일제히 절을 한다. 계속해서 무당의 사설과 춤이 이어지며, 중간중간 바깥 손님들을 불러 절을 시킨다. 눈발은 거세게 몰아쳤다가 그치고, 눈발 사이로 반짝 햇볕이 나기도 한다. 용왕굿이 끝나면 용왕에게 바칠 회식밥을 바다에 던지는 의식이 열리는데, 이 때 뒤따르는 사람들은 메김소리에 맞춰 흥겨운 ‘가래질 소리’를 따라부른다.


     어낭청 가래야     

이 가래는 뉘 가랜가

김첨지네 가래라네

어낭청 가래야

황금같은 내 조기야

어디 갔다 인제 왔나

어낭청 가래야



위도의 유일한 절집인 내원암에 걸린 초승달 풍경.


‘가래질 소리’와 함께 회식밥 노놔 주는 의식까지 다 끝나면, 물때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띠배를 띄우게 된다. 모선이 띠배를 매어 선착장을 출발하자 뒤따라 종선이 따라붙는다. 모선은 띠배를 맨채 먼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띠배 안에는 허수아비와 오방기뿐만 아니라 용왕밥을 주려고 만든 회식밥과 갖가지 소원을 적은 기원문도 함께 싣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띠배를 통해 모든 액을 바다 멀리로 실어보내는 것이다. 모선이 띠배를 끌고 오는 동안 배 위에서는 계속해서 풍물판이 벌어진다. 드디어 띠뱃놀이의 절정이다. 먼바다에 이르러 모선은 마을 사람들의 소원과 기원을 담은 띠배의 끈을 풀어버린다. 출렁출렁 띠배는 저 혼자 먼바다로 떠간다. 이로써 하루종일 이어진 띠뱃놀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폭설로 뒤덮인 위도 내원암 풍경. 그저 적막하다.


위도 띠뱃놀이가 소중한 것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풍어제의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위도의 띠뱃놀이는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 위도의 띠뱃놀이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조차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로 손꼽는데, 정작 우리 땅에서는 모르는 이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6년 전 처음 띠뱃놀이를 취재하러 갔을 때,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한 대학원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동아시아 풍어제>를 주제로 한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서 위도까지 왔다고 했다. 전수관에서 나와 한 방에서 밤을 보내기도 한 그는 1박 2일 동안 위도의 띠뱃놀이 전 장면을 캠코더에 담으며, 매순간 감격스러워했다. 그에 따르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학의 인류학과에서는 위도 띠뱃놀이가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위도의 띠뱃놀이가 외국에서 도리어 ‘최고의 풍어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때의 기억으로 한번 더 나는 띠뱃놀이를 기록하러 위도를 방문했던 것이다.


폭설 맞은 겨울의 배롱나무. 뒤틀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6년 전에 왔을 때에도 풍어제가 끝나고 폭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끊긴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번에도 풍어제가 끝나자 폭풍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6년 전만 해도 나는 배가 끊겨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번에는 이참에 위도를 찬찬히 한 바퀴 둘러보자고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나는 조선시대 관아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진리도 구경하고, 섬의 유일한 절집인 내원암도 둘러보았다. 내원암은 조선 숙종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데, 절집은 섬의 가장 깊숙한 산중에 자리해 있다. 내원암 추녀끝에 걸린 풍경은 여느 절과는 달리 물고기가 아니라 나무 초승달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한낮에도 내원암 추녀에는 언제나 초승달이 떠있다. 암자 앞마당에는 용틀임하듯 가지를 비틀며 멋지게 자란 배롱나무도 몇 그루 만날 수 있다.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풍경. 아빠가 딸을 태운 눈썰매를 끌어주고 있다. 


위도의 정금 해수욕장은 장동건이 출연했던 영화 <해안선>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이곳에서 <불멸의 이순신>을 찍기도 했다. 본래 위도는 우리나라 3대 어장 가운데 하나인 칠산어장의 중심지로 영광굴비(조기)의 산지였다. 위도라는 이름은 섬이 고슴도치 모양이라서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위도가 되었다. 옛날에는 유배지로도 이용되었으며,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 위도라는 견해도 있다. 상상 속의 율도국. 그러나 현실의 율도국에서 펼쳐지는 띠뱃놀이는 최근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 띠뱃놀이를 전수하려는 젊은이도 없을뿐더러 이제껏 띠뱃놀이를 지켜온 어르신들은 하나둘 저 세상으로 떠나고 있다. 맥을 이어온 사람들은 떠나고, 맥을 이을 사람들은 없다. 이것이 세계의 인류학자들이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로 손꼽는 띠뱃놀이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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