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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마존, 왕피천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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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최대 ‘생태계보전지역’ 왕피천에 가다



왕피리 마을의 구불구불한 마을길과 산자락을 에돌아 흐르는 청정 왕피천 풍경. (C)lee-yonghan&randomhouse <은밀한 여행> 

 

왕피천을 아는가. 대부분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왕피천은 울진에 있고,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왕피리를 사행하며 성류굴을 지나 동해로 빠져나가는 총연장 60킬로미터가 넘는 이 땅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가장 은밀한 하천이며, 국내에서 가장 큰 ‘생태계보전지역’이다. 왕피천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길이다. 영양군 수비면에서 장수포천을 따라 상류에서 접근하는 방법, 울진 서면 삼근리에서 현재 공사중인 박달재를 넘어 왕피리로 들어가는 방법, 울진 근남면에서 성류굴 쪽으로 난 길을 따라 하류에서 올라가는 방법, 울진 원남면 매화리에서 대령산 비포장길을 구불구불 넘어 왕피리로 들어가는 방법. 그러나 어떤 방법도 다 왕피천의 일부 구간만을 구경할 수밖에 없는 제한된 방법에 불과하다.


은밀한 계곡과 산자락 사이를 흘러가는 왕피천의 비경.


어느 쪽으로 가든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구간을 만나게 되며, 이런 베일에 쌓인 구간으로 인해 왕피천은 여전히 원시 그대로의 신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에서 비롯한 왕피천 본류는 왕피리에 이르러 통고산에서 흘러내린 계류와 만나 드디어 왕피천이란 이름을 얻어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을 구불구불 흘러 동해로 빠져나간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의 접근이 어려웠던 바, 왕피천 일대는 때묻지 않은 자연경관은 물론 지금까지도 원시 그대로의 생태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지난 2002년 환경부 생태계조사 결과 왕피천 수계 일대에는 천연기념물인 산양과 수달, 하늘다람쥐를 비롯해 삵과 담비와 같은 보호종을 포함 14종의 포유류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말똥가리, 황조롱이, 원앙, 물총새, 딱따구리 등의 조류가 60여 종, 꼬리치레도롱뇽, 옴개구리, 까치살모사, 구렁이와 같은 양서/파충류가 23종, 물잠자리, 밀잠자리, 길앞잡이, 풀무치, 호랑꽃무지, 청동풍뎅이를 비롯한 곤충류가 350여 종 정도로 조사되었다.


왕피천 하천가 돌멩이에 붙은 다슬기.


이 밖에도 왕피천 일대는 불영계곡 일대와 더불어 국내 최대 금강송 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이 곳의 금강송은 과거 황장목 또는 춘양목 등으로 불리며 궁궐 건축의 재료로 쓰이던 것들이다. 희귀식물인 고란초와 승마, 돌단풍은 물론 부처꽃, 노루오줌, 금마타리, 패랭이꽃 등 식물 생태계 또한 동물 생태계만큼이나 건강하고 양호한 편이다. 또한 왕피천은 봄이면 황어가, 여름이면 은어가, 가을이면 연어가 산란을 하러 찾아오는 모천이며, 1급수에 사는 갈겨니와 산천어, 꺽지, 가재, 다슬기 등 다양한 어류와 수서곤충이 어울려 사는 생태천국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녹색연합과 환경부, 지역주민들은 몇 년 전부터 왕피천 수계 일대에 대한 ‘생태계보전지역’ 지정을 추진해왔고, 결국 지난 2006년 국내에서 가장 큰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왕피천 숲에서 만난 쇠딱따구리.


‘제2의 동강’ 아니 동강보다 뛰어난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진 왕피천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하천과 다를 바 없는 하천의 모습을 띠고 있다. 사실 왕피천에만 가면 천연기념물인 산양과 수달을 만나고, 희귀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닌 것이다. 다만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오염원도 거의 없는 원시 그대로의 하천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피천을 찾은 보람은 충분하다. 왕피리에서 만나는 왕피천은 위쪽으로는 한천마을, 아래쪽으로는 속사마을이 차가 가 닿는 끝자락이다. 한천마을 위쪽으로 6킬로미터 정도와 속사마을 아래쪽으로 6킬로미터 정도의 구간은 여전히 베일에 쌓인 비밀스러운 구간으로 남아 있다. 한천마을에서 물길을 따라 위쪽으로 1킬로미터쯤 걸어서 올라가자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더 올라가려면 하천을 건너야 하는데, 하루 전에 내린 집중호우로 왕피천의 수량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왕피천의 거센 여울 물소리도 ‘비밀은 비밀로 남겨 두어야 신비로운 법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부처꽃 위에 올라앉은 잠자리.


왕피천 하천변은 드넓은 곤충의 천국이다. 모래밭의 풀섶을 헤칠 때마다 수십 마리의 벼메뚜기떼가 군무를 펼치며 날아간다. 방아개비와 풀무치, 두꺼비메뚜기도 재빨리 몸을 피한다. 메뚜기와 달리 베짱이와 털두꺼비하늘소는 대담하게 침입자의 눈길을 피하지 않는다. 이따금 왕파리매와 꽃무지, 풍뎅이와 길앞잡이도 눈에 띈다. 잠자리도 메뚜기만큼이나 많다. 가장 흔한 것은 된장잠자리와 고추잠자리이지만, 날개 끝에 흑갈색 무늬가 선명한 깃동잠자리와 크기가 작고 날개에 띠무늬가 있는 산좀잠자리, 몸이 푸른 밀잠자리, 흑갈색 날개에 몸은 광택이 나는 녹청색을 띠는 물잠자리도 보인다.


하천가 풀꽃 위에 앉은 털두꺼비하늘소.


하천에서 벗어난 산자락에는 노란 원추리가 한창이다. 군락을 이룬 참나리도 이제 막 꽃을 피우고 있다. 패랭이꽃, 부처꽃, 까치수영(까치수염), 금마타리, 메꽃, 노루오줌, 물레나물, 쥐오줌풀, 으아리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꽃들이 계곡에 가득하다. 하천 물줄기에서 단절된 웅덩이들은 가는 곳마다 무당개구리의 은신처 노릇을 한다. 더러 두꺼비처럼 온몸이 오둘도툴한 옴개구리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왕피천에는 갈겨니와 꺽지, 피라미, 송사리 등이 폭넓게 분포하며, 여름에는 은어, 봄에는 황어, 가을에는 연어가 산란을 위해 찾아오는 중요한 모천이자 생태통로 노릇을 한다. 접근이 어려운 만큼 왕피천과 왕피천 일대 전체가 거대한 생태천국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오지마을인 왕피리 마을과 길과 굽이진 왕피천 줄기가 어울린 풍경.


한천마을을 휘돌아나간 왕피천은 왕피리의 여러 마을을 가로질러 속사마을에서 다시 비밀의 구간을 지나 하류로 흘러내린다. 하류에는 2억5천만년의 신비를 간직한 성류굴이 있으며, 좀더 아래쪽에는 국내 최초로 들어선 민물고기전시관이 있어 생태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연어와 은어, 황어, 갈겨니, 산천어, 쉬리, 납자루떼, 참종개, 꺽지 등 살아있는 민물고기 50여 종과 왕피천에서 채집한 대형 연어를 비롯한 민물고기 표본 200여 점과 사진자료, 영상자료가 전시돼 있다. 야외 수조에도 비단잉어와 무지개송어, 붕어와 향어 등을 기르고 있어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왕피리에서 매화마을로 넘어가는 대령산 비포장길.


현재 왕피천이 흘러가는 왕피리에는 600가구 이상, 1500여 명 정도의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산다. 마을에 인접한 계곡에는 더러 낚시를 즐기거나 다슬기를 잡는 사람도 눈에 띄지만, 아직까지는 전체적으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청정하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이 곳은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오지마을이었지만, 생태농업을 실천하는 생활공동체 한농복구회 회원들이 집단이주를 시작하면서 큰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그럼에도 왕피천이 아직까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에서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생활하수도 모래와 미나리밭 등을 이용한 자연정화조를 통해 내보내는 친환경 생활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령산 비포장길에서 바라본 왕피리 일대의 저녁 무렵 산자락. 원시의 숲과 금강송 군락지가 이곳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런 친환경 생활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오염은 불가피하다. 삼근리와 왕피리를 잇는 박달재 도로의 포장공사를 하면서 금강송 숲인 국유림 지역은 이미 엄청난 훼손이 된 상태이다. 이 곳은 근래의 집중호우에 따른 산사태로 수십여 곳에 돌과 토사가 흘러내려 언제든지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왕피리 동수골에는 일제시대 때의 폐광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만일 오염된 침출수가 유출된다면, 왕피천으로 흘러내릴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과거 동강은 환경단체와 많은 사람들이 앞장서 댐 건설을 막아내고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지만, 생태계는 오히려 보전보다 파괴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상류와 지류의 오염원을 차단하지 못한데다 관광객 수가 늘어나고 특히 무분별한 래프팅 허용으로 수중 생태계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왕피리 인근 불영계곡에 자리한 불영사 풍경.


사실 왕피천도 하류인 성류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온천을 개발하는 문제로 사업자와 시민단체간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땅에는 ‘이 곳만은 개발해서는 안되는 곳들’이 있고, 왕피천도 그 중 한 곳이다. 잘 보전된 자연환경은 그 자체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자산이며, 어떤 교과서보다 훌륭한 교육의 장이고, ‘지구의 허파’인 것이다. 왕피천을 국내 최대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왕피천을 ‘한국의 아마존’이라 하고, 누군가는 ‘생태의 천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원시 그대로 놔두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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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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