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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05 연평도에서 바라본 NLL과 해주땅 9

연평도에서 바라본 NLL과 해주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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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주민의 70%가 황해도가 고향



아침 무렵 연평도 선착장 풍경.

 

연평도는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 카페리호는 4시간이 걸리는 먼 섬(인천에서 127킬로미터)이다. 바다에서 보면 소연평도와 대연평도가 함께 보이는데, 앞에 보이는 뾰족한 산을 가진 섬이 소연평이고, 옆으로 길게 펼쳐진 섬이 대연평이다. 뱃길에서 만나는 소연평의 명물은 얼굴바위다. 소연평 등대가 있는 절벽이 바로 얼굴바위로 옆에서 보면 코와 입이 툭 불거져나온 것이 사람의 옆 얼굴을 제대로 닮아 있다. 배는 소연평 선착장을 지나 대연평 당섬선착장에 사람들을 부려놓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연평도 해안 풍경과 멀리 바다 너머로 보이는 황해도 해주땅(위). 저녁의 조기역사관 실루엣(아래).

 

당섬과 대연평은 시멘트 다리로 연결돼 있어 걸어서 10분이면 족히 대연평에 이를 수 있다. 시멘트 다리를 건너다보면 왼쪽으로 펼쳐진 그림같은 섬이 보이는데, 이것이 꾸지섬(구지섬)이다. 가끔 여기에는 두루미가 날아와 새하얗게 섬을 뒤덮기도 해 몇몇 어부들은 학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섬과 꾸지섬 사이는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이 갯벌은 온통 자연산 굴밭이다. 하여 물때에 맞춰 이 곳에 나오면 연평도 사람들이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혹은 손수레를 끌고 삼삼오오 갯벌로 나가는 그림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갯일 나가는 풍경이야 다른 섬과 무에 그리 다를까마는 이 곳의 풍경은 소연평, 당섬, 꾸지섬 등의 절경으로 둘러싸인 데다 뻘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갯것을 먹으려는 갈매기떼의 군무가 장관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여느 갯벌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1999년 연평해전에 나섰던 참수리호 해군들에게 연평도 주민들이 떡과 고기를 나눠주고 있다.

 

시멘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난 시멘트길을 30여 분 정도 걸어가면 조기역사관이 자리한 관광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해벽 위에 우뚝 선 조깃배 동상을 지나 조기역사관으로 들어서면 그 옛날 조기 파시 시절의 사진과 함께 여러 조기 자료를 만날 수 있다. 관광전망대는 바로 조기역사관 옥상이다. 여기서 보면 연평도 북서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멋진 해벽은 물론 서남쪽에 뜬 소연평도와 꾸지섬도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광전망대에서는 북한 땅인 황해도 해주 땅이 코앞처럼 펼쳐져 있어 해주를 떠난 실향민에게는 그야말로 고향전망대 노릇을 한다. 바로 저 앞바다가 1999년 연평해전이 일어났던 교전지이며, 지금도 긴장감이 감도는 NLL(북방한계선) 구역인 것이다.

  


썰물이 되면 연평도 당섬과 꾸지섬 사이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지고, 이곳의 갯것은 연평도 사람들을 먹여살린다.

 

50~60년대에는 인천에서 연평도까지 뱃길로 14시간이 걸렸다. 새벽에 배를 타면 저녁 늦게서야 도착했다는 것이다. 인천까지 워낙에 먼 뱃길이다보니,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연평도는 해주가 생활권이었으며, 시장도 해주로 다녔다. 여기서 해주까지는 뱃길로 30분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실 연평도 주민의 70퍼센트 정도가 황해도가 고향이며, 6.25때 피난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조기파시가 한창일 무렵 연평도를 눈물바다로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갯벌이 드러나자 섬 사람들이 갯일을 나가고 있다.

 

이른바 ‘눈물의 연평도’라 불리는 이 때의 사고는 1959년 여름에 불어닥친 사라호 태풍이 주범이었다. “갑자기 태풍이 불어가꼬 그 많던 풍선배가 등대 안으로 못들어오고 말도 못하게 이북으로 떠밀려 막 넘어가고, 부서진 거야. 군인들도 그 때는 보초 서면서 뻐히 볼 뿐이지, 태풍이 그래 부는데 뭐. 마을은 쑥대밭 되고, 시신들 막 해변으로 밀려오고 그런 난리가 없었어. 그래 눈물의 연평도라 하잖아. 그래 어떤 사람은 임 장군님을 잘 못 모셔 그렇다고, 정한수 떠놓고 빌고, 세상 없어도 임 장군님만큼은 잘 모셔야 한다고, 지금까지 이래 모시고 있는 거지.



당섬에서 바라본 연평도 선착장과 섬마을 풍경.

 

한창 잘 나가던 시절만 해도 연평도에는 1000여 명의 술집 색시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연평도에 사는 주민을 다 합쳐도 1000여 명이 되지 않는다. 조기파시가 끝나고, 꽃게잡이도 시원찮게 되면서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육지로 뱃머리를 돌렸기 때문이다. 현재 연평도에는 소연평에 단 한 척(서려호, 선주 조동희 씨)만이 그 옛날 조기잡이배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나머지 50여 척의 배는 모두 꽃게잡이배다.

 


연평도 하늘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맹금류.

 

“꽃게도 많이 날 때는 길바닥에 막 꽃게가 밟힐 정도로 많이 잡았어. 중국배가 안 들어왔으면 지금도 꽃게가 그렇게 많겠지. 남북한 경계인 NLL 지역에 꽃게가 많이 새끼 낳고 그러는데, 그걸 중국 어선들이 다 잡아가는 거야. 한번은 중국배가 저 NLL에 있는 모루섬까지 들어와서는 모닥불을 피웠다가 바람이 부니까 불이 난 거야. 섬이 다 탔어. 우리는 NLL에 한번 들어가 걸리면 벌금이 300만원, 두 번째는 700만원이야. 중국배들은 다 들어와 잡고, 우리는 못들어가고. 중국배가 하도 잡아가니 요즘에는 바다에 나가도 꽃게가 없어 이제.” 포구에서 만난 한 어부의 얘기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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