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가면 산다, 삼둔 사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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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가면 산다, 삼둔 사가리




숨겨진 비경 내린천 상류를 거슬러오르면 거기 적막한 산중마을 ‘살둔’이 나온다. 본래 ‘살둔’이란 땅이름은 ‘이 곳에 오면 산다’는 뜻으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당시에도 난리를 겪지 않을 정도로 안전하여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옛날 세조 집권을 반대하여 단종 복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일부가 훗날을 기약하며 내린천을 거슬러 올라 이 곳 살둔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지리적으로는 홍천군 내면 광원리와 인제군 상남면의 경계, 즉 내린천 상류와 계방천 하류가 만나는 접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으로는 원시의 비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개인산과 방태산이, 남동쪽과 남서쪽으로는 석화산과 맹현봉이 살둔을 에워싼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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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김삿갓을 자처하는 풍류객들의 안식처이자 피난처 노릇을 해왔던 살둔산장.

<정감록>에는 ‘삼둔 사가리’라 하여 살둔 근방의 일곱 곳을 일러 ‘피난지소’로 기록하였는데, 삼둔은 바로 홍천군 내면에 있는 살둔, 월둔, 달둔이고, 사가리는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에 있는 적가리(곁가리라고도 함), 아침가리(조경동), 연가리, 명지가리였다. 이 가운데 사람이 사는 마을은 아침가리와 살둔 뿐이며, 적가리골에는 현재 방태산 자연휴양림이 들어서 있다. 삼둔 사가리를 피난처로 꼽았던 까닭은 이 지역의 지리적인 특성 때문이다. 우선 살둔을 중심으로 삼둔 사가리를 둘러싼 산들은 방태산, 개인산, 구룡덕봉, 맹현봉, 계방산을 비롯해 1천미터 이상의 높은 산이 즐비하게 솟아 있다. 그 때문에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살둔을 비롯한 주변 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로 손꼽혔다. 물론 지금도 살둔 주변의 몇몇 마을은 ‘두메산골’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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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둔'이란 땅이름은 '이곳에 오면 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감록>에는 살둔을 비롯한 주변의 일곱 곳을 최고의 '피난지소'로 기록하였다.

살둔에 이르러 사람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역시 살둔의 명물로 불리는 ‘살둔산장’. 20여 년 전에 지어진 이 산장은 그동안 ‘산사람’들과 몇몇 ‘김삿갓’을 자처하는 풍류객들의 안식처이자 피난처 노릇을 해 왔다. 살둔산장의 형태는 우리네 전통 귀틀집 모양을 띠고 있다. 지붕은 양철로 해 얹었지만, 절 짓는 대목이 와서 지은 탓인지 일반 산장과는 다른 독특한 멋을 풍기는, 그런 산장이다. “이 산장이 짓는데만 3년이 걸렸어요. 윤두선 선생이라고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절을 짓고 남은 재목으로 이 산장을 지었죠. 산장 바닥에는 숯가루, 소금, 모래, 자갈을 다 깔고, 지경다짐만도 사흘을 했다고 해요. 통나무 사이에는 황토와 짚을 섞어 미장을 하고, 마루와 방 사이는 굴피를 대서 방음 효과를 냈어요. 그 위에 귀틀을 올린 거죠. 자연친화적인 집이에요.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폭 파묻힌 집이죠.” 이곳 산장지기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이 산장은 일부러 거칠게 지은 집이란다. 목재를 곱게 다듬은 것이 아니라 자귀질로 투박하게 깎아 올린 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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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둔 인근 율전리 가는 길에 만난 산중 계곡 풍경.

살둔을 비롯한 ‘삼둔’이 홍천군 내면 쪽에 자리해 있는 반면, 사가리는 인제군 기린면 쪽에 자리해 있다. 또 이 사가리 가운데 연가리(진동리)를 뺀 적가리와 아침가리, 명지가리가 모두 방동리 땅에 속해 있다. 우리에겐 방동약수가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방동리. 사가리 가운데서도 최고의 두메로 알려진 아침가리(조경동)는 방동리에서도 산을 하나 넘어 10킬로미터 남짓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기린면 진동리 갈터에서 계곡을 타고 올라가더라도 8킬로미터 정도는 가야 하는 거리. 아침가리라는 이름은 마을에 밭이 적어서 아침 나절에 밭을 다 갈 수 있다고 붙은 이름이란다. 현재 이 곳에는 세 가구가 살고 있으며, 폐교가 된 방동 초등학교 조경분교도 외롭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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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기린면에 자리한 사가리 중 하나인 아침가리(조경동)의 외로운 집 한채. '아침가리'는 아침 나절에 밭을 다 갈 수 있다는 뜻.

아침가리에서 진동리 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연가리는 과거 담배(연초)를 많이 갈았다고 ‘연갈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현재 통나무집을 거느린 자연휴양림이 옛 마을을 차지하고 들어선 적가리에는 ‘보름가리’도 있었다고 한다. 방동리 밤골에 사는 박명철 씨에 따르면 적가리에는 커다란 분지가 하나 있어 과거 이 분지를 일러 ‘보름가리’라 불렀다는 것이다. 아침가리가 아침 나절에 밭을 다 갈 수 있었던 반면, 적가리의 보름가리는 보름을 갈아야 밭을 다 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는 얘기다. 박명철 씨는 이 커다란 분지(지금은 낙엽송을 심어 놓았다)를 별똥이 떨어진 자국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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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리 중 적가리골에는 현재 방태산 자연휴양림이 들어서 있다. 적가리골의 작은 폭포.

밤골에는 현재 22가구가 살고 있으며, 20여 년 전까지는 안쪽에 자리한 적가리에도 20여 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울진, 삼척사건이 일어났을 때 화전민을 정리하면서 모두 쫓겨났다는 것이다. 또 일제 때만 해도 적가리에는 분교가 있을 정도로 마을이 컸다고 한다. “여기가 옛날부텀 이름난 피습지요. 교통이 불편한 것 빼고는 이만한 데가 없을 거요. 옛날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장에를 갈래두 여기서 콩 두세 말 짊어지구 저 조침령(새도 하룻밤 묵어간다는 고개) 넘어서 저기 서림이라는 곳에 마방이 있었대요. 거기서 하루 자고, 원래 양양이 큰 곳이라서 거기 가 장 보구, 저녁에 다시 소금 한 말 짊어지구, 막걸리 한 잔 걸치구, 다시 마방에서 하루 자구, 이튿날 일루 넘어 왔대요. 장 한번 보믄 2박 3일씩이나 걸린 거죠 뭐. 옛날 노인들이 다 그렇게 살민서 지킨 땅인데, 저래 다 쫓겨나고 만 거죠.” 밤골에 사는 박명철 씨의 이야기다. 이들 모두 왜란도 피하고, 6.25도 피했지만, 분단의 현실과 산업화의 물결은 피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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