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 만난 제주도같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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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없는 몽골인의 은밀한 휴양지


길안내를 맡은 비지아 교수(37, 몽골국립대 한국어과 교수)는 알타이 산맥이 고향이다.
알타이 시내에서도 하루 반나절은 더 가야 하는 곳이다.
과거 교통수단이라고는 말과 낙타밖에 없던 시절,
그의 고향에서 울란바토르를 가자면 한달 이상 걸렸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할아버지는 징집명령을 받아 말 타고, 낙타 타고 나중에는 걷기도 하면서 두달이나 걸려 울란바토르에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마실 물이 없어서 말 오줌까지 마시고, 먹을 게 없어서 신발까지 잘라서 그 국물을 먹으며 울란바토르까지 갔다는 것이다.
울란바토르에서 차를 타고도 닷새가 걸렸으니 그럴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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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삭트 하이르항 가는 길에 만난 몽환적인 풍경. 산자락과 초원과 구릉의 어울림!

그 때는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르던 시절이었다.
어린 비지아는 만년설산 아래서 말도 타고 양도 몰면서 하루를 보냈다.
유목민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유난히도 이삿날(사계절에 한번씩)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였다.
“이사하기 전날 어디로 갈까, 어떤 말을 타고 갈까, 행복과 설렘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유목민이 이사할 때면 말을 맨앞에 세우고, 소 가고, 양(염소) 가고, 맨 나중에 낙타에 짐을 실어 이사한다. 그렇게 1년에 네 번씩 이사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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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 바위산 너머로 보이는 하삭트 하이르항의 만년설산(위). 하삭트 하이르항 가는 길에 만난 고원의 유목민(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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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알타이는 과거 몽골이면서도 몽골이 아닌 곳이었다.
몽골인종 중에서도 알타이족은 인종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할흐족과 풍습이나 생활방식, 언어 등이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오랜 동안 두 부족 간에는 크고 작은 싸움이 빈번했다.
지금도 알타이 서부와 울란바토르의 생활방식과 문화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가령 몽골의 중부지방에 ‘허미’라는 전통음악이 있다면
알타이 서부에는 ‘도울’이라는 알타이 민요가 있다.
도울은 워낙에 노랫말(알타이 전설)이 길어 전곡을 부르는데만도 2~3일이나 걸린다고 한다.
결혼식 때도 알타이 서부에서는 <풍부하고 하얀 알타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잔치를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쉬임없이 노래를 부르는 게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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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삭트 하이르항 가는 길에 만난 제주도스러운 분지형 지형(위)과 오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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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에서의 셋째날.
이른 아침 알타이 북쪽 3시간 거리에 있는 하삭트 하이르항(3370m)을 향해 출발한다.
이곳 또한 알타이 산맥에 속한 만년설산이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좀처럼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삭트 하이르항으로 가는 동안 눈앞에 보이는 만년설산은
하늘에 뜬 회색구름에 덮여 이따금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또다시 이어지는 구릉과 벌판.
이따금 제주도의 오름처럼 솟은 언덕과 일출봉과도 같은 분지들!
지나는 초원마다 어김없이 양떼와 염소떼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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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돌담처럼 하삭트 하이르항 가는 길에는 양떼를 가두기 위한 돌담 우리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초원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염소떼’가 몽골의 사막화를 부추긴다는 이야기였다.
비지아 교수가 들려준 이 이야기는 실제로 몽골에서 요즘 골치를 앓는 문제이기도 했다.
“몽골 유목민은 염소와 양을 함께 키우는데, 염소는 전체 무리의 10~20%만 있어야 한다. 양은 식물의 줄기만 잘라먹지만, 염소는 식물의 뿌리까지 캐먹기 때문에 염소가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최근 바얀홍고르 등의 대초원에서 염소떼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유는 염소털, 즉 캐시미어 때문이다. 양털이 1kg에 100투그릭인 반면, 캐시미어는 1kg에 무려 4만 투그릭이나 한다. 그러니 유목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염소를 키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초원의 사막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사실상 초원의 사막화를 부추기는 원인은 염소떼(물론 더 큰 원인은 지구온난화 현상에 있지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유목주의를 벗어난 이기주의에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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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삭트 하이르항 설산 계곡의 건천. 눈이 녹으면 이 건천은 물이 흐르는 하천으로 변한다.

하삭트 하이르항 산중 계곡에는 몽골인들만이 찾는 휴양소가 들어서 있다.
외국인을 거의 본 적 없는 안내원과 그의 딸과 두 마리의 몽골견은
처음 찾아온 외국인을 위해 양을 몰다 말고 계곡의 길안내를 맡고 나선다.
여기저기 샘솟는 약수와 나무가 우거진 빙하수 계곡과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는 동굴 얼음까지 다 보여주고서야
안내원은 계곡을 내려갔다.
휴양 대신 휴식을 취하며 우리는 두어 시간을 그곳에 머물렀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염소 우는 소리.
그리고 타라바가(타르박) 우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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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을 찾아볼 수 없는 몽골인들에게만 알려진 하삭트 하이르항 휴양지의 안내원(위)과 휴양지에서 바라본 산자락 풍경(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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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바가는 다람쥐보다 약간 작은 설치류를 말하는데,
몽골에서는 타라바가에 대한 몇 가지 버전의 전설이 전해온다.
그중 한가지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옛날 하늘에 태양이 7개나 생겨 가뭄이 들게 되었다.
그때 활 잘 쏘는 사람(에르히 메르겡) 한 명이 사람들에게 “내가 저 태양을 다 쏴서 없애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는 차례로 여섯 개의 태양을 쏘아 없애고,
마지막 태양을 쏘려고 활을 당겼는데, 그만 화살이 날아가던 제비 꼬리에 맞고 말았다.
제비 꼬리가 화살표 모양인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화가 난 명사수는 말을 타고 밤새 제비를 좇았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
그는 자책하며 엄지 손가락을 자르고 어두운 구멍 속으로 들어가 남은 생을 타라바가로 살았다.
타라바가의 앞발가락이 네 개인 까닭도 그 때문이라고 하며,
고기가 사람고기 맛이 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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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삭트 하이르항 가는 길의 어버에서 만난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유목민.

알타이 산맥은 거의 한반도 남북 길이 2배 정도, 총길이 2,000k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산맥이다.
산맥의 줄기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중국에 걸쳐 있지만,
몽골에 가장 넓고 길게 뻗쳐 있다.
알타이 산맥은 고비알타이, 몽골알타이(보통 알타이산맥이라고 함), 소비에트알타이 등 세 지맥으로 나뉘는데,
삼림지대를 이루는 산맥의 서남쪽에 비해 산맥의 북동쪽인 몽골지역은 스텝과 준사막을 이룬 곳이 많다.
환경이 척박한 몽골의 알타이 산맥에는 동물의 분포가 그리 많지 않아서 늑대나 스라소니, 야생염소가 이따금 발견될 뿐이다.
다만 알타이 산맥을 비롯한 몽골 전역에 걸쳐 타라바가 같은 설치류가 많아
이것을 포식하는 솔개와 독수리 등 맹금류는 아주 흔하게 분포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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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에서 하삭트 하이르항으로 넘어가는 언덕 위에서 바라본 구릉의 길(위)과 구릉 너머로 펼쳐진 초원(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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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삭트 하이르항 인근의 풍경은 실로 다양함과 단순함이 공존한다.
이를테면 산자락이 연달아 펼쳐진 히말라야와 같은 풍경이 있는가 하면,
오름과 분지가 어우러진 제주도다운 풍경도 있고,
협곡과 건천, 초원과 사막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공존한다.
초원은 초원대로, 구릉은 구릉대로 알타이 산맥의 '푸른 바람' 속에서
북반구의 차디 찬 '바람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 맛있는 알타이의 푸른바람::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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