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경리 선생 강연록: 문학은 모순된 세계에서 균형을 잡는 일

|

故 박경리 선생 강연록: 문학모순된 세계에서 균형을 잡는 일

<몇년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열린 故 박경리 선생 문학 강연록입니다. 전문이 길어 일부만 발췌해 실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2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만난 박경리 선생.

제가 오늘 강의를 제대로 하려고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아 밖의 일도 안 하고 쉬다가 오늘 나왔습니다. 강연 제목인 ‘균형에 대하여'에 대해 여러분들이 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문학과 균형이 어떤 관계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요즘 세태를 보면 명확하고 확실한 어떤 진실에 대해서 거의 망각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전체에 대한 망각이지요. 역사적으로 샤머니즘시대는 과학적인 규명은 없었지만 생명에 대한 상상과 자유로움과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인간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생명에 대한 아주 정열적인 추구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에는 어떻게 영혼과의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접신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또 어떤 생명을 막론하고 생명의 위대함에 대한 숭배가 있었습니다. 천년, 오백년 된 나무에 제를 지낸다던가, 나무에 절을 하는 풍습은 아직도 시골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오백년, 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경험하고 누린 나무가 지닌 생명에 대한 숭배이고 그와 교신하고 싶은 염원입니다.

모든 생명은 능동적이며, 동일하고 공평하다

모든 생명에는 능동성이 있습니다. 나무에도 능동성이 있으니까 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생명은 풀잎이든, 하루살이라 하더라도 능동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능동적인 힘으로 볼 때는 모든 생명은 동일하고 공평한 것입니다. 다만 오래 살았다면 어떤 지혜로움이 있을까 하는 숭배가 나무에 대한 숭배로 변하는 것이지요. 이후 불교시대에 와서는 한 생명이 어째서 존재하며 그 생명의 위대함은 어떤 것이며, 또 영원함에 대한 추구의 방식 같은 틀이 생겼습니다. 유교시대에 와서는 이것이 아주 크게 축소돼 인간의 기본,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 등 인간에 대한 것으로 축소됐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리가 아주 좁아졌습니다. 인간이라는 공동체적인 것마저 없어지고, 그것이 자유라고 오인되고 있어요. 오늘날은 모든 것이 자유같지만 사실 자유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 기계화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자리는 너무나 좁아져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옛날 군주시대보다 더한 감시와 압박 속에 한 순간도 조직이라는 것에서 도망갈 구멍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극도로 분업화된 것입니다. 한 인간의 인격이라는 것이 없고 하나의 기계부품처럼 분업화 됐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인간성이 필연적으로 상실돼가는 것이고 우주라든지 모르는 것, 도저히 규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력이 없어요. 다만 자기 앞에 주어진 조그만 세계에 얽매여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이것이 창조력에 어떻게 기여하고 어떤 결과로 나타나겠습니까. 균형을 말하기에 앞서 모순이라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균형과 모순은 상당히 상통된 것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의 사조나 모든 것이 들어와 있어서 모순에 대해서 대단히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동양은 모순을 인식함과 동시에 받아들이는데 서양에서는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모순과 미신에 대하여

모순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 이것이 모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영원히 두개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순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지구를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원심력이 더하다면 지구는 터집니다. 구심력이 더하다면 우주의 온갖 잡동사니가 붙을 것입니다. 두가지 경우 모두 지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지구가 떠있는 것입니다.

바로 모순이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인간과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났는데 왜 죽느냐. 그것이 모순입니다. 태어남과 죽는다는 것은 원심력과 구심력 같이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없다면 삶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모순이라는 것을 서양처럼 규명하고 없앨 성질이 아닙니다. 명확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모순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알 수 없는, 통속적으로는 운명적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적어도 생명이 존중된 시대에는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샤머니즘 시대에는 저승과 대화할 수 없을까, 다른 세계 즉 저승에는 죽은 우리의 형제나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은 미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열렬한 열망입니다.

오늘날 과학적으로 볼 때는 과학도 생명의 신비를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추구하는 열망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모순은 모든 우주적인 존재 구조 자체가 모순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모순을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학만능주의가 돼서 그런 것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른다는 것, 알 수 없다는 것, 신비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이상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류입니다. 현대인들은 조그마한 틀 속에서 눈에 보이는 숫자적인 것, 통계적인 것, 분석되는 것만을 인정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설가 박완서 선생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문학은 인간 전체를 다뤄야 한다

우리가 아는 것이 모래알만하다면 모르는 것은 우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래알만한 지식이 인생의 전부라면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모순이라는 얘기가 균형과 약간 흡사한 데가 있습니다. 모순은 인위적인 것이라기보다도 알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의 차원에서 볼 수 있고 균형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동적인 능력에 의해서 균형은 이루어집니다. 모든 예술이나 창조되는 것도 균형에 의해서 창조되고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균형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어요. 문학에 있어서도 요즘 작가들이 쓴 작품 보면 이 세태를 그냥 따라가고 있어요. 어떤 실험소설이라고 해서 다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이것이 문학의 본질은 아닙니다. 특히 한심스러운 것은 이 본질적인 문제에서 얼마나 문학이 벗어나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요즘 ‘엽기'라는 문제를 어디서 취급도 하고 그런다던데, 그것을 보면서 제가 한심스럽다고 했어요. 엽기적이라는 것은 작품 속에서 어떤 유니크한 부분은 돼요. 그러나 인생이라는 큰 부분에서는 한쪽 귀퉁이의 어떤 부분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그것은 어떤 기호입니다. 반면 쌀이나 식량이 없으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커피같은 잉여적인 것을 마치 삶의 본질인 양 여기저기서 부산하게 다루는 것을 보면 정말로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항상 하는 얘기가 ‘예술이란 이차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존하는 것, 존재하는 것이 첫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환경문제에 열을 올리는 것은 모든 부분이 생존과 관계없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추상적이지만 전반적인 인생의 전체를 다루는 것이고, 의학은 어떤 부분을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 전체가 의학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학은 의학도 아니고 법률도 아닙니다. 인생의 재현입니다. 인간 전체를 다루어야 합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하는 얘기가 엉성해도 전체를 파악한 뒤에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됩니다. 정확하고 정교하다고 해서 참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꿈입니다. 전체적인 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 삶이나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없고 해석될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문학도 그 소재가 무엇이든간에 균형이 잡히면 어떤 소재이든 설득력과 진실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해도 전체를 망각한 부분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창조는 균형을 거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반드시 균형을 문학과 결부시켜 얘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인생 자체에 대한 균형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신체적으로 볼 때 예전에는 못 먹어서 영양결핍에 걸려 죽는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못먹어서 그랬는데 오늘날에는 영양과다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균형을 못잡아서 그런 것입니다. 과다하지도 결핍도 없는 그 중심에 생명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균형이라는 게 무슨 실제 물체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인격에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존재하게 하는 겁니다. 창조라는 것은 처음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균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의 육체, 인격, 정신적 현상이 모두 해당합니다.

우리는 지금 균형이 무너진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우려스럽게도 균형이 없어져가는 과정입니다. 지구 자체가 균형이 깨졌어요. 인간의 역사를 보면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끝없는 혁명을 되풀이해왔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성공을 못했습니다. 어느 시기가 지나면 또 새로운 것이 등장합니다. 역사는 발전한 것 같지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소품들은 발전을 했습니다. 발전을 한 것이 대가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의 대가가 큰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역사상의 위대한 혁명가, 사상가들은 인간이라는 집단을 위해서 혁명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요. 평등이라는 것은 생명의 평등으로 넓혀지지 않으면 지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양식이나 능동성의 문제에서 풀잎이나 하루살이나 그것의 세계는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상론이라고 반박을 합니다. 약육강식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복잡한 문제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지식인들의 생략법입니다.

생명은 당연한 것인데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소위 생태계지요. 우리가 쉽게 말하자면 땅이라는 생명의 잔해를 먹고 식물들도 삽니다. 경제제일주의를 떠들지만 극단적으로 땅이 다 죽어서 생산해 낼 수 없을 때 여러분들이 벌어들인 화폐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한주먹의 쌀이 우리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완전히 균형이 깨지고 있습니다.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서구적인 발상입니다. 무한경쟁은 궁극적으로 얘기하자면 하나만 남기자는 얘기입니다. 하나가 남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종이 없어집니다. 적어도 둘이라야 종이 생깁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서구에서는 모순을 깨려고 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모순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인 신경림 선생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존재를 위한, 모순이라는 질서

인간도 생명의 일종으로서, 생명이 평등하지 않은 이상 인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인간을 위해서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실패합니다. 인간을 위해서 환경운동을 하고 종을 살리고 방법을 강구하면 한계점에 달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생명이 평등해야 합니다. 생명이 생명을 먹고 산다는 것은 순환이고 균형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생존할 만큼 먹는다면 질서가 유지됩니다. 인간도 자연의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운명같다고 말한 것이 모순입니다. 부조리합니다만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삶을 인식할 수 없어요. 누가 존재하기 위한 모순이라는 질서를 만들어냈는지 나는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 실정을 보세요. 정치계나 교육계나 모든 분야에서 완전히 균형이 파괴돼 있습니다. 어떤 가치와 존재에 의해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시적인 욕망이 얼마나 존재를 파괴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욕망과 다릅니다. 뭐든 내 맘대로 하는 욕망은 자유와 다릅니다.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한 욕망을 얻기 위해서 역사가 투쟁을 한 것은 아니거든요. 생존을 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남에게 내 정신을 침해받지 않기 위한 자유입니다. 욕망 때문에 남을 죽이고 자기 욕망을 채우는 자유라면 역사상 자유를 위한 투쟁의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건강도 좋지 않아서 두서가 없었지만, 오늘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Trackback 0 And Comment 3
  1. Favicon of https://soon1991.tistory.com BlogIcon 오드리햅번 2008.05.16 10:2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문학은 인간전체를 다뤄야한다는 낱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
    안타까움 마음입니다.
    여행여독은 풀리셨나요.

  2. 2008.05.16 11:25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3. 2008.05.16 13:1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