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길 사라지는가: 70리 청풍 호반길을 따라서
제천 금성면에서 충주 지동리까지 70리 청풍 호반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하나같이 그림같다.
산 아니면 물, 물 아니면 산. 그 사이로 한 줄기 바람같은 길이 흘러간다. 길이라면 무조건 포장하고야 마는 나라에서 이토록 긴 비포장길을 만난다는 건 분명 행운이다. 청풍에서 호수의 비경을 따라 충주 솟대거리까지 내내 털털거리며 가는 길. 때묻지 않은 산천을 좋아하는 여행자들과 옛길을 더듬어온 길의 감식가들 사이에서 이 길은 ‘가장 아름다운 길’로 통한다. 그러나 수몰민에게는 이 길이 수장된 고향을 보며 가야 하는 코끝이 찡한 길이다. 길은 30km가 훨씬 넘게 먼지 날리는 비포장으로 금성면 진리를 지나 황석리, 후산리, 부산리, 오산리, 만지, 지동리까지 내내 이어진다.
오후의 햇살 속에 빛나는 호수 위의 판잣집. 낚시꾼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길의 일부 구간이 포장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성면 사오리와 후산리 구간을 포장하더니 야금야금 아스팔트 구간을 넓혀가고 있다. 지역의 환경단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비포장길’을 지키기 위해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현재 포장구간은 점점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고, 조만간 전구간이 포장될 예정에 놓여 있다. 길이 있으면 무조건 포장하고야 마는 건설공화국의 사명은 이 길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듯, 공사는 강행되고 있다.
부산리 지나 만지로 이어진 비포장길. 이 아름다운 비포장길은 이제 포장될 운명에 처해 있다.
옛 순례길을 보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일본과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옛 농로를 지켜내 ‘길’ 그 자체가 세계복합유산이 된 스페인과 프랑스의 예에서도 알수 있듯, 길은 그 자체로 문화유산이고 훌륭한 관광자원이라 할 수 있다. 제천의 금성면에서 충주의 지동리까지 이어진 이 길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길고 가장 아름다운 비포장길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냥 두더라도 이 길은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이며, 훌륭한 하이킹 코스가 될 수 있다. 비포장길 자체가 포장도로보다 더한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수도 있다. 사실 이 길은 그런 부가가치를 다 깔아뭉개고 포장할만한 이유나 설득력이 별로 없는 곳이다. 통행이 혼잡한 것도 아니고, 지역민의 숙원사업도 아닌 길에다 국민의 혈세를 퍼붓는 셈이다.
청풍 문화재단지에서 볼 수 있는 연자방앗간(위). 비포장길이 시작되는 금성면에서 볼 수 있는 구룡리 박도수 초가 전경(아래).
개인적으로 나는 이 길을 10여 차례나 여행했다. 때로는 차를 타고, 때로는 걸어서 넘었다. 2년 전에도 나는 이 70리 길을 걸어서 넘은 적이 있다. 혼자서 타박타박 충주시 동량면 지동리에서부터 금성면 진리까지 넘어왔다. 아침 늦게 출발해서 저녁에 도착했다. 그때 나는 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촉을 발바닥으로 느꼈다. 때로 다리가 아팠고, 때로 마음이 아팠다. 길 위에서 나는 계절마다 다른 풍경과 바람과 하늘을 경험했다. 봄이면 길가에는 생강나무꽃과 산수유, 갯버들과 산버들이 환하게 피고, 가을이면 마타리, 구절초, 벌개미취와 들국을 지천으로 만난다. 이따금 만나는 담배 건조실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하나같이 무너져 있다.
호수 속의 섬. 섬 속의 가을(위). 비포장 호반길에서 바라본 오후의 호수와 소나무 몇 그루(아래).
부산리나 오산리 쯤에서 바라본 호수 풍경은 바다처럼 장쾌하고 시원하다. 때로 호수에 뜬 몇 개의 작은 섬들이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내기도 한다. 맨 처음 이 길을 지날 때는 부산리란 마을에서 고창운 노인을 만났다. 당시 92세였던 노인은 귀가 어두워 나는 입을 바싹 들이밀고 큰소리로 외쳐야 했다. 내가 “여기 혼자 사세요?” 하고 외치면, 노인은 “여기 혼자 왔어?” 하고 동문서답했다. 늙은 나이에도 그는 혼자 밥해 먹고, 토종벌도 치고, 심지어 옥수수 농사도 짓는다고 했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적적해두 할 수 없쥬. 내 손으로 밥 낋여먹으며, 사는 게 다 그렇쥬 뭐.” 구십 노인의 사는 게 다 그렇다는 평범한 경구가 내 귀에는 평범하지 않게 들렸다.
후산리에서 사오리 가는 길에 만난 깨타작 풍경(위). 지동리에서 만난 씨옥수수 걸어놓은 풍경(아래).
내가 다시 걸어서 이 길을 지날 때 그 노인은 집에 없었다. 마당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었고, 문짝은 뜯겨져 마루에 나뒹굴었다. 노인의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말만 귓속에 웅웅거렸다. 애써 나는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노인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부산리는 며느리산(婦山) 밑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풀어서 말하면 며느리마을이 되는 셈인데, 그 때문인지 부산리에서는 산제당에 여신을 모신다. 다른 마을과 달리 당산제도 한여름인 7월 초하루에 지낸다. 날을 잡고 제주를 뽑으면 그 사람은 파리 한 마리두 잡을 수가 없다. 새끼로 금줄을 두른 성황나무 밑에서 만난 지수영 씨(67)는 바로 앞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 나와 묻지도 않은 당산제 이야기를 드문드문 털어놓는다. 그가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동안 느티나무의 커다란 그늘은 그의 얼굴에 송송 돋아난 땀을 다 식혀주었다.
호숫가 뙈기밭에서 타작한 땅콩을 고르고 있다.
부산리 오산리 지나서 만나는 만지에는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만지는 말 그대로 가득찬 연못이란 뜻으로, 수몰될 것을 미리 알고 지은 땅이름같다. 길은 만지를 지나쳐 지동리에 이르면 기나긴 비포장 구간이 끝난다. 지동리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치 비포장길이 끝난 것을 알리듯 아스팔트와 흙길의 경계에 우뚝 서 있다. 여기서 포장도로를 타고 조금만 더 가면 이제 하곡마을 솟대거리가 나온다. 마을 길가에 마치 가로수처럼 즐비하게 솟은 것들은 다 솟대다. 이는 모두 조각가 윤영호 씨(60)가 만들어 세운 것들이다.
황석리의 무너져가는 건조실 풍경(위). 황석리 비포장길에서 만난 들국(아래).
그가 이 마을에 들어와 솟대를 세우기 전부터 하곡마을은 ‘솟대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마을 곳곳에 솟대를 세우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마을 노인들은 여기가 옛날에 솟대거리였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우연 치곤 기막힌 우연이다. 현재 ‘하늘이 열리는 곳’이라는 뜻의 개천안 자리가 바로 옛날부터 솟대를 세워오던 곳이란다. 하여 그는 이 자리에 과거에 있던 열두 개의 자연마을을 상징하는 열두 대의 솟대를 세웠다. 이 열두 대의 솟대는 반은 호수를 향하고, 반은 산을 바라본다. 농사가 잘 돼라는 뜻에서 풍요를 뜻하는 물쪽으로 반을 두고, 인재가 태어나 마을을 빛내라는 뜻에서 반은 산쪽으로 머리를 둔 것이다.
충주 솟대거리에서 만난 떼솟대 풍경.
열두 대의 솟대를 세우면서 하곡마을 거리에는 본격적으로 솟대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그 숫자는 50여 대 이상으로 늘어났다. 오랜 옛날 솟대를 세워 성역을 표시했던 곳을 ‘소도’라 불렀던 것처럼 그는 하곡마을을 현대의 ‘소도’로 꾸며가고 있는 셈이다. 본래 윤영호 씨는 판교에 작업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난개발로 주변 환경이 어수선해지자 몇 년 전 이 곳으로 들어와 호숫가 빈 흙집에 작업실을 차렸다. 그가 빈집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이 집은 솟대공원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마을은 솟대마을로 불리기 시작했다.
지동리 숲에서 만난 아침 햇살.
하늘이 열리는 곳에 터를 잡은 탓인지 그의 집에서는 유난히 하늘이 넓어보인다. 그 넓은 하늘을 담은 호수는 집 앞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그가 깎아놓은 새떼들도 표표히 허공을 떠다닌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이 있듯이 솟대는 인간의 영혼과 소망이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옛날 사람들은 장대 끝에 앉은 오리가 인간의 소망을 물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솟대가 옛날에는 소망의 안테나였던 셈이다. 나는 솟대에게 작은 소원 하나를 빌었다. “이 길고 아름다운 비포장길을 지켜주세요”라고.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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