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지금부터 나는 달타냥이라는 수컷 고양이의 바보 같은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그것을 순진한 사랑이라거나 지고지순이라 표현해도 달라질 건 없다. 블로그나 책에서 밝힌 것처럼 달타냥은 지난 해 여름 ‘깜찍이’란 고양이와 사랑에 빠져 결국 자신의 거처인 파라대문집 헛간에 신방을 차렸드랬다. 둘 사이에서 다섯 마리 아기고양이도 태어났다. 그 녀석들의 좌충우돌 성장기에 대해서는 오직 <명랑하라 고양이>에만 실려 있어 여기서 다 밝힐 수는 없지만, 달타냥이 기꺼워했던 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떠난 뒤에야 그 사랑이 소중했다고."
최근에 만난 몇몇 사람들은 내게 달타냥과 깜찍이의 근황에 대해 묻곤 했다. 요즘 통 달타냥에 대한 이야기가 블로그에 올라오지 않아서 궁금하다는 거였다. 답변부터 하자면 달타냥은 잘 지낸다. 깜찍이도 역시 잘 지낸다. 게다가 요즘에도 두 녀석은 단짝처럼 붙어다닌다. 고양이 사회가 분명 일부일처제가 아님에도 달타냥은 그런 고양이 사회의 통념을 깨고 오직 깜찍이만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내가 모르는 사이 달타냥이 카사노바 행세를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 비친 녀석의 모습만은 깜찍이가 마치 운명의 사랑인 양 하고 있다.
우리집 마당 급식소에서 사료를 먹고 돌아가는 달타냥. 가다가 갑자기 발라당.
그러나 둘 사이에도 냉전이 있었고, 이별이 있었다. 지난 해 가을이었다. 달타냥과 깜찍이 사이에 태어난 다섯 마리 아기고양이는 약 4개월 가량 파란대문집 헛간을 보금자리 삼다가 뿔뿔이 각자의 길로 떠났다. 어차피 그곳은 녀석들이 언젠가 떠나야 할 자리였다. 이후 깜찍이도 그곳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다만 깜찍이는 아주 멀리 떠난 것이 아니어서 밤이면 종종 우리집 마당 급식소에 나타나곤 했다. 깜찍이네 다섯 마리 아기고양이 중 한 녀석도 가끔 마당 급식소를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다른 녀석들은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너에게 가는 길은 멀고, 그리움은 눈 처럼 쌓이네."
깜찍이와 아기고양이가 떠나자 북적거리던 파란대문집 헛간은 갑자기 적막해졌다. 늘 함께 지지고 볶던 식구들이 떠나자 달타냥은 한동안 심심한듯 혼자서 파란대문 앞에 나앉아 있곤 했다. 녀석의 눈매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참 희한한 것은 그 때부터 달타냥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달타냥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지 몰라도 내가 느끼는 바로는 그건 영락없는 방황이었다. 녀석은 가끔씩 집을 떠나 며칠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과거에도 일주일씩 집을 떠났다 돌아온 적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 빈도가 잦았다. 녀석이 돌아온 것을 보고 이튿날 찾아가보면 또 다시 녀석은 집을 비우고 없었다. 녀석의 외도는 거의 초겨울까지 이어졌다. 그러니까 깜찍이 식구들이 떠난 이후로 나도 녀석을 만난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나는 망부석처럼 기다렸네. 그리고 결국 너는 돌아와 내 등뒤에서 끄억끄억 울었지."
나는 궁금했다. 달타냥은 정말로 방황을 한 것일까. 아니면 거처를 옮긴 깜찍이네 새 보금자리에 머물다 이따금 집을 찾아온 것일까. 그동안 녀석의 삶 자체가 미스테리였다. 파란대문집 할머니에게 달타냥 소식을 물어보면 나가서 안들어온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녀석을 미행해보지 않는 한 녀석의 행적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오매불망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가끔씩 파란대문집 앞에 앉아 녀석을 기다렸다. 그 때마다 녀석은 오지 않았다.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 녀석이 겨울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시금 제자리를 되찾았다. 녀석의 몰골은 오랜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듯 초췌하지는 않았고, 몸이 더욱 더 부어 있었다. 그동안 길에서 거친 음식께나 먹었던 모양이다. 털도 거칠어졌고, 건강 상태도 안좋아 보였다.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세요. 아이들 키우랴, 그 녀석들 독립시켜 내보내랴 나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다구요..."
그런데 녀석이 불규칙한 삶을 끝내고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인지 운명인지 깜찍이가 다시 파란대문집 헛간에 들어앉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집 마당 급식소까지 매일같이 먹이 동행이 시작되었다. 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집 마당을 찾아와 사료를 먹고 갔다. 한번은 이른 아침에 두 녀석이 마당에서 사료를 먹다 말고 투닥투닥 싸우는 거였다. 한참을 싸우더니 둘은 다시 사이좋게 사료를 먹고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그런데 참 믿을 수 없는 사실은 달타냥 녀석조차 깜찍이처럼 우리집에서는 ‘나’를 낯선 사람 취급한다는 것이다. 깜찍이야 예전부터 우리집에서 대하는 태도와 파란대문집에서 대하는 태도가 달랐지만, 달타냥은 아니었다. 몇 달 간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녀석이 나를 몰라보는 것일까?
"여기가 왕년에 왕초고양이 바람이가 밥 먹던 곳이래... 그 녀석 요즘 왜 안보이는 걸까?"
하루는 녀석이 ‘생까는’ 이유가 궁금해서 녀석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이 녀석 내가 부르면 고개를 돌려서 냐앙냐앙 넙죽넙죽 대답했다. 대답은 하면서 동시에 도망을 치는 거였다. 어떨 땐 가다가 한참 발라당도 하다가 내가 가까이 가면 또 도망을 가는 거였다. 더욱 황당한 사실은 과거 왕초고양이였던 ‘바람이’ 영역과의 경계선이었던 마을회관을 지나자마자 태도가 180도 변해서 갑자기 앙냥냥거리고 발라당거리면서 부비부비한다는 거였다. 뭐지 이 시추에이션은? 이런 녀석의 태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근데 이 냄새 낯설지가 않아. 뭐지 이 공간, 이 상황, 이 기시감은..."
달타냥은 엄연히 집이 있는 마당고양이다. 그런데 이 녀석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길고양이가 다 됐다. 길고양이 깜찍이와 오래 어울리다 보니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듯하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다. 어쨌든 달타냥은 한동안 방황의 세월을 보냈고, 다시금 제자리를 되찾았다. 그것이 돌아온 옛사랑 때문인지, 서방(기둥서방 아니냐고?)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동안 깜찍이가 어떤 수컷들을 만나고 다녔는지도 알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요즘 둘 사이가 전에 없이 좋다는 것이고, 파란대문집 헛간이 또다시 산후조리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밥 먹으러 함께 오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죠. 그래서 행복하냐구요?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깜찍이 녀석 평상시에도 워낙에 배가 불룩해서 현재 임신을 한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깜찍이가 다시 달타냥을 찾아와 헛간을 빌린 것으로 보아 녀석은 임신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만 깜찍이가 돌아오기 전까지의 행적을 모르는 나로서는 둘의 사랑이 여간 의심스러운 게 아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튼 타냥아! 이번에는 ‘오쟁이 진 줄도(자기의 아내가 다른 사내와 간통하다는 뜻) 모르는’ 그런 사랑이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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