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의 무법냥
때는 봄이어서 3월하고도 중순인데,
난데없는 폭설이 내렸다.
그것도 적설량 20cm가 넘는 엄청난 눈이었다.
봄이 온줄 알고 서둘러 무논에 나온 개구리도 도로 자취를 감추었다.
논두렁에 파릇파릇 돋아나오던 봄쑥과 냉이도 눈에 파묻혔다.
내린 눈은 오후가 되면서
어쩔 수 없는 봄 날씨에 조금씩 녹아내려
길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봉달이, 설원의 무법냥이 따로 없다. 눈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고양이.
그러나 길가의 논과 들은 온통 설원으로 변해
도무지 이건 봄 풍경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봄이 온줄 알고 기지개를 켜던 고양이들 또한 다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눈이 싫지만은 않은 봉달이 녀석은 오늘도
눈이 쌓인 개울 둑방을 어슬렁거렸다.
내가 먼 발치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 녀석 눈이 녹은 길을 놔두고 굳이 지름길인 눈 쌓인 논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 모습은 거침없는 설원의 무법냥이었다.
설원을 달려와 길 위로 올라서자 마자 녀석은 발라당 자세로 먹이 구애를 하는 게 아닌가.
이 녀석처럼 눈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고양이도 드물 것이다.
하긴 지난겨울의 폭설 중에도 녀석은 덩달이를 꼬여내
눈밭 달리기를 했을 정도니까.
설원을 달려오는 고양이 한 마리.
논에 세워놓은 볏가리며 뒤로 보이는 눈 덮인 산자락의 실루엣이며
희미하게 보이는 마을의 집들과 전봇대와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들이
설원을 달려오는 고양이의 멋진 배경이 되었다.
"아저씨 옷에서 낯선 고양이의 냄새가 나는 걸..."
내가 다릿목에 이르자
헐레벌떡 설원을 달려온 봉달이 녀석은
힘든 기색도 없이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3일만에 보았는데도 반갑다고 녀석은 진창이 묻은 앞발을 들어
자꾸만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눈이 녹기 시작한 길에는 녀석이 걸어온 발자국이
고양이로서의 선명한 족적을 남겼다.
어디선가 진창을 뒤집어썼는지 등짝에 흙탕이 잔뜩 묻은 덩달이.
그런데 늘 함께 다니던 덩달이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봉달이를 앞세워 마을로 들어서자
뒤늦게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덩달이 녀석이 진창길로 나왔다.
가만 보니, 덩달이 녀석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눈이 녹은 흙탕을 뒤집어썼는지
등짝과 옆구리에 온통 흙탕을 묻히고 있었다.
등짝의 털에 잔뜩 들러붙은 진창의 모래와 흙은 어느 새 구덕구덕 말라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 진창길을 지나던 차바퀴가 튕겨낸 흙탕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듯했다.
일부러 녀석이 진창에 뒹굴었을 리는 만무할 터이니.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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