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길고양이 가족의 먹이원정 1개월의 기록
벼 그루터기만 남은 황량한 논자락을 걸어
어미고양이 한 마리와 두 마리의 아기고양이가 걸어옵니다.
과거 축사고양이의 수장이었던 대모가
아기고양이를 데리고 먹이원정을 오는 길입니다.
녀석이 아기고양이를 이끌고 먹이원정을 나선 것은 처음인 듯합니다.
보아하니 아기고양이는 족히 3개월령 안팎은 되어 보입니다.
그동안 급식을 해오던 돌담집에서 여러번
대모를 만났지만, 임신을 한 지도 아기냥을 낳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녀석의 영역은 돌담집 인근이 아니라
여기서 100여 미터 이상 떨어진 다리 인근쯤으로 추정이 되는데,
그동안은 늘 혼자서만 급식장소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물론 한밤중에 아기고양이를 데리고 몰래몰래 돌담집을 다녀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다만 벌건 대낮에 내 눈으로 녀석이 아기고양이와 함께
먹이원정을 오는 것을 목격한 건 처음입니다.
올 봄 축사가 철거되기 직전에 녀석은 축사에서
여섯 마리의 아기고양이를 낳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축사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무슨 변고가 생긴 건지
이후 녀석이 낳은 아기고양이는 단 한 마리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아픔을 간직한 대모가 다시 새끼를 낳아서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실 두어 달 전 돌담집을 영역으로 살아가던 가만이와 카오스는 갑자기 영역을 옮겼고,
여리도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여리가 낳은 꼬리가 짧은 아기고양이도 종적을 감추었더랬습니다.
하지만 나는 급식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급식소를 차리고 급식을 해왔습니다.
대모와 미랑이 등이 꾸준하게 이곳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모는 아기고양이를 데리고 먹이원정을 왔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사료를 녀석들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한달을 보냈습니다.
알고보니 대모가 낳은 새끼는 노랑이 두 마리에 고등어 한 마리,
모두 세 마리였습니다.
지난 한달간 꾸준히 녀석들에게 사료를 급식한 결과
대모네 아기고양이는 처음의 경계심과 불안함에서 벗어나
이제는 제법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2미터 안팎의 안전거리만 유지하면 녀석들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있든말든 즈이들끼리 녀석들은
놀고 먹고 자고 장난을 칩니다.
녀석들은 주로 먹이원정을 와서 논자락에 쌓인 짚더미에 머뭅니다.
이 짚더미가 녀석들의 짚단 휴게소인 셈입니다.
녀석들은 이 푹신한 곳에서 쉬다가
돌담집 장독대로 올라가 해바라기를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대모가 아기고양이 세 마리를 다 데리고 온 적은
두세 번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동안 살펴보니 대모는 한 마리만 데려올 때가 가장 많았습니다.
데리고 오는 순서도 따로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녀석이 어떻게 로테이션을 짜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노랑이 한 마리-고등어 한 마리-자장 묻은 노랑이 한 마리-노랑이 두 마리-고등어 한 마리- 세 마리 다...
마음 내키는대로 하는 걸까요?
분명한 건 먹이원정길이 100여 미터 이상이다 보니
나름 안전을 고려한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모가 돌보는 또 한 마리의 아기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여리가 남기고 간 꼬리 짧은 아기고양이입니다.
아무래도 여리는 영역을 떠난 게 아니라
어떤 문제가 생겨 무지개다리를 건넌 듯합니다.
그래서 남겨진 아기고양이를 할머니인 대모가 보살피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기사는 조만간 다시 올리겠습니다)
보아하니 대모네 아기들과 손주는 월령도 비슷해 보였는데,
마치 한배에서 난 것처럼 잘 어울렸습니다.
부디 이들 길고양이 가족의 무탈과 행복을 빕니다.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 트위터:: @dal_lee
'길고양이 보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쌓인 나무에 올라간 고양이 1초후 (28) | 2010.12.28 |
---|---|
어미 잃은 손주 데려다 키우는 할머니 고양이 (35) | 2010.12.27 |
고양이가 대문을 빠져나오는 방법 2 (12) | 2010.12.26 |
고양이를 찾아라 10 (15) | 2010.12.25 |
겨울 길고양이의 물 구하기 (26) | 2010.12.24 |
어느 길고양이 가족 먹이원정 1개월의 기록 (30) | 2010.12.23 |
고양이를 찾아라 9 (18) | 2010.12.22 |
밥 먹을 땐 필사적인 고양이 (21) | 2010.12.22 |
<명랑하라 고양이> 책표지 설문조사 (191) | 2010.12.20 |
폐차장으로 간 고양이 (21) | 2010.12.20 |
절묘하다 이 자세 (23) | 2010.12.17 |
- 이전 댓글 더보기
-
미남사랑 2010.12.23 11:13
그래도 대모는 대모인게...모든 애기들을 보살피는군요..
대모야 힘들지?~~~목에 상처는 또 어떻게 된거냐...제발 무사하기를 바란다.
이번 겨울을 무사히 나야 하는데..대모야 힘내...!! -
labluu 2010.12.23 11:31
여리의 행방에 대한 추측이 또 눈물을 흘리게 하네요
어차피 길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들의 목숨은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런 소식을 접할때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이쁜 아이였는데요, 모든 아이들이 다 이쁘긴 하지만요
저도 3년이상 밥을 주고 있는 길냥이,,한동안 안보이더니 어제 아주 우연히 예상치 못한 낮시간대에 조우했습니다.
꽁치캔을 받아먹고 나서 저에게 어디 사는지 자기 사는 곳을 보여줬습니다.
3년만에 처음으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인도하더라구요, 마치 "여기가 내가 사는 곳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전 이 아이의 서식지(?)를 알게 된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렇게 또 한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관계를 맺게 되는게 두렵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아마 모든 고양이와의 인연이 그렇겠죠
달이님 너무 상심하시지 마시고 고양이를 향한 발걸음, 손길마다 힘내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