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차장 고양이
축사에서 돌담집으로 영역을 옮겨 살던 가만이가
어느 날 차량정비소 폐차장으로 영역을 옮겼다.
벌써 두어 달 전이다.
가만이와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만이네 아기고양이 카오스가
돌담집에서 사라졌다.
이어 여리마저 돌담집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다.
"저 뒤에 보이는 차들이 내 차들이에요..."
돌담집에는 여리의 새끼인 꼬리 짧은 아기노랑이만이 남아서
한동안 냐앙냐앙 어미를 찾아대곤 했다.
그리고 결국 애타게 어미를 찾아대던 아기노랑이마저
돌담집에서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사료배달을 해오던 돌담집에는 남아 있는 고양이가
단 한 마리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왜 다들 정기적으로 사료 공급이 되던 그곳을 떠난 것일까.
폐차장을 나오던 카오스가 무럭이와 마주쳤다.
의심 가는 구석이 있긴 하다.
지난 늦여름과 초가을 쯤 돌담집 마당에서
서너번인가 누군가 내놓은 밥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돌담집에 머무는 고양이를 보고
집 주인이 녀석들을 위해 내놓은 것이라 여겼다.
시골에는 아직도 이런 인정이 살아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무렵
가만이가 낳은 아기고양이들이 차례로 세 마리나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무럭이에게 놀라 다시 보금자리인 폐차로 돌아온 카오스. 그러나 궁금함을 참지 못해 뒤따라온 무럭이.
한번은 돌담집에서 내놓은 밥그릇 바로 옆에서
죽은 쥐를 본 적도 있다.
내놓은 밥이 금세 푸르딩딩한 것이 못내 수상쩍었다.
아무래도 쥐약을 섞어 내놓은 것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곳의 고양이들이 차례로 희생당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었다.
가만이나 여리, 카오스 녀석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가을이 끝나갈 무렵
가만이는 카오스를 데리고 영역을 옮겼고,
여리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제야 나는 그때 내놓은 밥이 그냥 밥이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근처에 있던 가만이가 경계를 서고 있다.
어쨌든 가만이와 카오스는 돌담집을 떠나
차량정비소 폐차장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녀석들이 살던 돌담집과 현재 노을이와 무럭이네가 사는 영역의
중간쯤에 자리한 곳이다.
거의 한달쯤 되었을 것이다.
무럭이 남매와 순둥이 당돌이, 승냥이를 위해 사료배달을 하고 돌아서는데,
밭 둔덕 너머에서 한 녀석이 앙냥냥거리며 뛰어오는 거였다.
가만이네 카오스 녀석이었다.
녀석은 넉살좋게 남의 영역에 내려놓은 사료를 한참이나 먹어치우고
폐차장 쪽으로 달아났다.
폐차 위에서 혹은 폐타이어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카오스.
다음날 폐차장 쪽을 기웃거리다가 그곳에 가만이와 함께 있는 카오스 녀석을 발견했다.
두 녀석은 차량정비소 폐차장의 폐차된 차들과 타이어 더미를 보금자리로 삼고 있었다.
폐차장 고양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폐차장 또한 나의 사료배송처가 되었다.
녀석들이 이곳으로 영역을 옮긴 뒤,
무럭이 3남매와 카오스는 자주 부딛쳤다.
다행히 무럭이 3남매는 가만이와 카오스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어서
별다른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카오스.
그러나 순둥이와 당돌이, 승냥이 등은 달랐다.
특히 순둥이와 승냥이는 가끔 폐차장을 찾아와 무력시위를 하곤 했다.
순둥이는 본래 유순한 성격이지만,
최근 배가 불러오면서 꽤 예민해진 상태이다.
순둥이 고것이 참하기만 한줄 알았더니
가만이에게 꼬리털을 세우며 덤벼들어 결국 꽁무니를 빼게 만드는 것을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승냥이 또한 노을이의 눈을 피해 무럭이네 영역으로 배달되는 사료를 얻어먹고 있었는데,
근처에 가만이가 있으니 자기 몫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여긴 모양이다.
녀석 또한 툭하면 이곳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무럭이네 영역을 찾았다가 순둥이에게 쫓겨나고 있는 카오스.
하긴 가만이와 카오스가 둥지를 튼 영역이
한쪽은 노을이와 무럭이네와 맞닿고 한쪽은 승냥이네와 경계를 삼고 있었다.
승냥이 또한 최근에는 두 마리의 아기고양이를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까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가만이와 카오스는 폐차장에서 새로운 묘생을 시작했고,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다.
가끔은 두 녀석이 폐차된 지프와 타이어 더미 속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두릅나무 숲까지 우다다도 한다.
축사에서 쫓겨나 돌담집으로, 그리고 다시 폐차장으로...
녀석의 생도 참 기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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