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착한 그루밍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리며 개울로 내려간다.
비가 그친 월요일 오후의 하늘은 라임색 고양이 눈을 닮아 있다.
얼마 전 개울가 느티나무 속잎이 피어난 것 같은데,
벌써 잎이 무성하게 자랐다.
"아~함! 그루밍이나 해볼까나!"
개나리꽃도 지고, 벚꽃도 다 졌다.
개울물은 더 탁해졌다.
비가 내렸기 때문이 아니다.
장마가 닥치기 전에 하천공사를 끝내려는 중장비들이 위에서 연일 무리한 공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개울의 시간은 적막했고,
대모네 가족은 무사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무사태평한 고양이의 날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불안한 시간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고 했던가.
우리 시대의 고양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실상 이 시골구석 어디에도 고양이가 안전한 곳은 없다.
도처에 도사린 위험 앞에서 고양이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도피하는 묘생을 살아야 한다.
고양이에게는 낭만과 평화를 향수할 시간이 없다.
미래는 기약할 수 없고,
생존만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그나마 대모네 식구들에게 ‘해방구’와도 같은 개울이 있어서 천만 다행이다.
다행이다, 아직은 장마철이 아니어서.
이 다행과 무사로 대모네 식구들은 오늘도 개울가에서, 배수구에서 한동안 태평했다.
그 태평한 시간에 녀석들은 눈치 보지 않고 그루밍을 했다.
심지어 배수구 입구에 앉아서 느긋하게 몸단장을 했다.
언제 어디서나 그루밍.
그동안 고양이들의 그루밍을 무수한 곳에서 숱하게 만나왔지만,
배수구에서의 그루밍은 특별한 것이었다.
배수구라는 원형의 공간은 그루밍하기에 적당했다.
미학적으로 배수구의 동그란 구멍은 고양이와 잘 어울렸고
구조적으로 배수구의 알맞은 높이는 고양이에게 안전했다.
무엇보다 보는 내가 보기에 좋았다.
이 착한 그루밍.
요즘에는 봄볕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해서
배수구의 그늘이 열기를 식히는 장소로도 괜찮았다.
재미는 그곳에서 나를 놀리듯 온갖 기괴한 표정으로 그루밍을 했고,
소미는 묘기에 가까운 자세로 배수구에 몸을 맞췄다.
꼬미는 아래쪽 위쪽 배수구를 옮겨다니며 공간이동 그루밍을 선보였다.
대모는 그런 녀석들을 개울가 너럭바위에 앉아서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한번은 소미가 배수구에서 자세를 바꿔가며 그루밍을 하는 동안
재미는 배수구 바로 아래서 전혀 다른 그루밍 타임을 가졌다.
그나저나 대모는 축사에서 살던 시절에도 늘 자신의 새끼들을 끼고 살더니
지금까지도 두 녀석의 새끼를 독립시키지 않고 늘 함께 살고 있다.
게다가 품안의 자식이었던 여리가 남기고 간 꼬물이까지 제 자식처럼 돌보고 있다.
아무리 손자라고 해도 제 자식처럼 6개월 이상을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숭고한 모성 아니면 바보 같은 사랑!
아무튼 고양이가 배수구에 앉아서 그루밍하는 ‘그루밍 먼데이’는 그렇게 흘러갔다.
개울에 뜬 구름처럼.
느티나무 이파리를 흔들고 가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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