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등 뒤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은 쓸쓸하다.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사랑은 언제나 아프다.
차마 앞에서 얼굴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등만 보고 걷는 날들은 먹먹하다.
그게 짝사랑이든, 외사랑이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든.
여기는 앞을 보고, 노랑이는 앞을 보는 여기의 등만 보고...
여기 한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교회를 영역으로 살아가는 교회 노랑이 수컷. 꽤 잘 생겼다. 멀쩡하게 생겼다. 이 녀석은 요즘 부쩍 두충나무가 숲을 이룬 고양이숲을 찾곤 한다. 역전고양이 ‘여기’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인지, 다른 사랑이 있는 것인지, 여기는 노랑이의 집요한 대시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내가 고양이숲에 이르렀을 때, 여기는 자기가 좋다고 졸졸 뒤를 쫓아다니는 수컷 고양이를 마다하고 쪼르르 나에게로 달려왔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야! 하악~"
교회 노랑이는 나와 안면이 있기는 하지만, 별로 친분도 없는지라 내 앞으로 피신한 여기를 그저 저쪽에서 원망스런 눈빛으로 바라만 보았다. 두충나무 뒤에서 얼굴 반쪽만 내밀고 몰래 이곳을 엿보기도 했고, 수풀 속에서 고개를 쭉 빼고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 인석아! 난 밥만 주고 갈게!” 나는 고양이숲으로 들어가 두충나무 아래 쪼그려 앉았다. 내 뒤를 졸졸 따르던 여기는 급기야 내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나와 눈을 맞췄다. “아저씨! 쟤 이상해요. 내 뒤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어요.” 여기의 눈빛을 내 맘대로 번역해 보자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여기: "아 정말 쟤 땜에 미치겠어요!" 노랑이: "나두 미치겠어요."
노랑이 녀석은 저쪽에서 나를 바라보는 여기의 등짝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사료를 내려놓고 고양이숲을 빠져나오자 그제서야 노랑이는 ‘애애애앵’거리며 여기에게로 접근했다. 노랑이는 배가 고플 텐데도 사료에는 관심이 없었다. 녀석은 뒤에서 사료를 먹고 있는 여기를 또 한참이나 바라만 보았다. 그러더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기회를 엿보는 것인데,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무드고 뭐고 이렇게 얌전하게 앉아 있는 여기의 모습은 처음이라며 노랑이는 갑자기 여기의 엉덩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가 어디를 가도 졸졸졸.
“하악~! 카악~!” 사료를 먹던 여기는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노랑이에게 하악을 날렸다. 내가 봐도 타이밍이 안좋았다. 이 녀석 혹시 여기가 아니라 여기가 먹는 사료가 탐이 난 건가? 나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노랑이에게도 한 움큼 사료를 건넸다. 그런데 이 녀석 사료 한 입 먹고는 여기 한번 쳐다보고, 또 한 입 먹고는 또 쳐다보고. 사료보다 확실히 여기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있었다. 그건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 결국 여기가 배를 채우고 나에게로 다시 걸어오자 녀석도 먹던 사료를 팽개치고 ‘애애애앵’ 여기의 뒤를 따랐다.
"이래뵈도 나 명랑고 표지모델 출신이야~!"
노랑이 녀석에겐 지금 배고픔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렇게 열심히 따라다니는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여기가 저 녀석의 마음을 받아주면 좋으련만, 콧대 높은 여기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교회 노랑이 녀석 언제부터 여기를 쫓아다녔을까. 여기는 왜 이 멋진 녀석을 마다하는 걸까. (사람의 눈에 매력적인 고양이가 꼭 고양이 세계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한참을 따라다니던 노랑이는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타박타박 논두렁을 지나 밤나무 그늘을 건너 교회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쓸쓸했다.
"나 지금 바쁜데, 인사는 나중에 하면 안될까~"
다음날 고양이숲에는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노랑이는 여기를 따라다니고 있었고, 여기는 여전히 노랑이를 피해 도망다니고 있었다. 아직도 둘의 사이는 진전이 없었다. 내가 고양이숲에 나타나자 노랑이는 “저 인간 또 왔네!” 하는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 때 어디선가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저기’가 나타났다. 하필이면 노랑이가 여기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이 시점에 ‘저기’가 나타난 것이다. 저기는 교회 노랑이와 안면이 있는지 “너 또 왔냐?” 하면서 노랑이에게 다가가 코를 맞대며 인사했다. 그러자 노랑이는 “방해 말고 저리 가지!” 하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저기의 인사를 받았다.
"사랑이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요?"
‘저기’도 같은 암컷이지만, 녀석의 관심은 오로지 ‘여기’에게만 가 있었다. 일편단심 민들레인 거냐? 저기가 저기로 걸어가 사료를 먹는 동안에도 노랑이는 여전히 여기의 등만 바라보았다. 여기는 그것도 모르고 자매끼리 사료를 씹으며 앙냥냥 수다를 떨었다. 모르긴 해도 수컷 노랑이 뒷담화께나 했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저쪽에서는 여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뜨겁게 여기까지 전해졌다. 시골구석 수컷 노랑이의 사랑은 그렇게 쓸쓸하고 바보같았지만, 어쩐지 첫사랑의 풋풋함이 묻어났다. 배경음악으로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흘러나와도 괜찮겠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냥이를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냥이를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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