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하겠네, 울릉도 성인봉 원시림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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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장하겠네, 울릉도 성인봉 원시림단풍




울릉도를 하늘에서 보면 마치 여우의 얼굴을 쏙 빼닮았다. 그 여우의 얼굴 중심에 코처럼 불룩 솟아오른 것이 성인봉이다. 섬치고는 꽤나 높은 해발 983미터의 봉우리. 어느 때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인과도 같은 산’이란 뜻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성인봉을 오를 때는 무릇 ‘인자’(仁者)가 되어야 한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인봉 꼭대기에 오르면 필경 해무 사이로 독도를 보는 행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강원도 오대산까지 보인다고 하니, 이를 보려면 한 3대쯤 덕을 쌓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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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봉 정상에서 알봉분지 쪽으로 바라본 장쾌한 원시림 단풍 능선.

오랜 세월 빈 섬으로 남아 있었던 탓에 성인봉 주변은 밀림과도 같은 원시림(천연기념물 제189호)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해가 들지 않는 활엽수 그늘에는 비밀의 화원처럼 이끼의 숲이 펼쳐져 있다. 아름드리 나무에서 아무렇게나 뻗어올라간 가지와 그 가지를 휘감고 이 나무 저 나무로 치렁치렁 뻗어나간 넝쿨이 얽히고 설킨 이 원시의 숲에서 인간의 오만한 생각과 사소한 가치들은 무의미해진다. 성인봉에서는 나무와 풀과 걷고 날아다니는 모든 ‘날것’들과 생명 없는 것들까지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이치를 따른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정복하려는 불순한 마음을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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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만큼 화려하지도, 내장산처럼 곱지도 않지만, 원시 그대로의 천연한 단풍숲이 여기 있다. 울릉도 성인봉 원시림 단풍.

성인봉에 오르는 길은 도동에서 오르는 길과 나리분지에서 오르는 길, 두 갈래다. 도동에서 오르는 길이 훨씬 편하고 밋밋하지만, 원시 그대로의 숲, 원시림의 치렁치렁한 단풍숲, 원시림 단풍 너머로 보이는 북면의 바다를 만나기 위해서는 나리분지 코스가 제격이다. 나리분지와 알봉분지를 거쳐 성인봉으로 오르는 길은 신령수 지점까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신령수를 지나면서부터는 가파른 경사가 6~7부 능선까지 계속된다. 가파른 경사가 한풀 꺾이는 지점부터는 이제 정상부까지 성인봉 원시림지대가 내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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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한 원시 그대로의 단풍숲.

때마침 단풍은 절정에 이르러 원시림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빛깔의 잎들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다. 그동안 숱한 단풍을 보아 왔지만, 이토록 아찔한 단풍은 처음이다. 정말로 환장할 풍경이다. 설악산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내장산처럼 곱지도 않지만, 원시 그대로의 단풍숲과 그 너머로 펼쳐진 알봉분지의 풍경과 북면의 푸른 바다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성인봉 단풍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원시림 단풍 너머로 보이는 장쾌한 분지와 푸른 바다. 성인봉에 올라 알봉분지 쪽으로 펼쳐진 원시림 단풍을 보는 순간, 누구나 할말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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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봉 분지에서 만난 투막집. 가을 낙엽이 잔뜩 떨어져 있다.

사실 원시림지대까지 올라오는 동안 나는 태어나서 가장 힘든 등산을 해야 했다. 경사가 험한 탓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아침도 먹지 않았고, 나리에서 겨우 파전 한 조각과 막걸리 한잔을 먹은 게 전부였다. 배가 고파서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게다가 나는 10킬로그램이 더 되는 카메라 가방까지 매고 있었다. 설상가상 가방 외피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물통은 어디로 빠졌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원시림 인근 샘물에서 나는 물로 배를 채웠지만, 물을 담아갈 통이 없었다. 통이라고는 네 개의 빈 필름통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물 한 모금 들어가는 필름통마다 물을 채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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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에 있는 독도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동항 풍경. 성인봉보다 단풍이 한발 늦다.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아찔한 원시림 단풍과 성인봉에서 알봉분지까지 스펙트럼처럼 펼쳐진 단풍의 물결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거의 탈진 상태에서 나는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는 성인봉 정상에서 한 20분쯤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다행히 성인봉에서 도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길보다 훨씬 순했다. 성인봉을 오를 때 사람들이 왜 도동 쪽에서 오르는지 알겠다. 이래저래 성인봉에서 내려와 도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다 되어 있었다. 공복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7시간의 산행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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