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고양이 수난의 날들
지난 초봄 전원주택 다롱이에게 쫓겨난 고래고양이는 여전히 수난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다섯 마리의 새끼를 모두 사산한 데 이어 얼마 전에는 고래등에 심한 상처까지 입었다. 꼬리와 등 사이에 손바닥보다 크게 털이 뭉텅 뽑혀서 맨살이 다 드러났다. 그렇게 드러난 부분은 한동안 곪아서 짓무르고 터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래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배고픔의 고통이었다.
고래고양이 고래등에 난 상처. 털이 뜯겨져 나가고 짓물렀다.
녀석은 몰래몰래 전원주택을 찾아가 다롱이가 있나 없나 눈치를 보면서 사료 동냥을 하곤 했지만, 요즘에는 그조차도 힘들어졌다. 한번 쫓겨난 고래에 대해 다롱이는 물론이거니와 금순이와 팬더, 소냥시대의 유일한 고등어 암컷까지도 고래의 출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다. 공교롭게도 모두 암컷들이다. 녀석들은 고래가 집 근처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집단으로 야르릉 카악거리며 고래를 멀리 쫓아버리곤 한다.
고래고양이는 전원주택의 다롱이와 팬더, 금순이, 고등어 암컷으로부터 공격을 받곤 했다.
전원주택에서 쫓겨난 이후로 고래는 인근의 소나무밭과 묏등 건너 덤불숲을 전전하며 살았다. 태어나 지금까지 밥걱정일랑 없이 살다가 갑자기 밥 굶기를 밥 먹듯 하다보니 녀석의 몰골은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며칠에 한번 꼴로 내가 일부러 고래를 찾아 따로 밥상을 차려주곤 있지만, 녀석이 받은 마음의 상처와 허기까지 채워줄 수는 없었다. 녀석은 늘 전원주택의 날들을 그리워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내가 전원주택을 찾는 날이면 어떻게 알고 울타리 바깥에 와서 으냥으냥 울었다. 할머니는 그게 참 신기하다고 했다.
그나마 고래고양이에게 우호적인 고양이는 전원고양이 중 소냥시대 노랑이 수컷들이다.
“참 희한하네. 고래가 이 선생만 오면 나타나네. 요새는 아롱이한테 하도 혼나서 그런지 아예 오지도 않더니, 이 선생이 오면 용케 알고 찾아오네. 거참!” 그동안 전원고양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고양이가 이 녀석이라는 것을 녀석도 아는지, 고래는 내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용기를 내어 전원주택까지 올라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녀석은 내가 밥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밥을 먹을 때에도 지켜줄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나는 몇 차례 고래를 마당까지 끌어들여 밥 먹는 녀석의 보초를 선적도 있다.
심신이 지친 고래고양이가 느티나무 그늘에 엎드려 있다(위). 울타리 바깥 밭에서 전원주택을 바라보는 고래고양이(아래).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이 녀석 내가 아무리 꼬드겨도 마당까지는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롱이에게 된통 혼난 게 분명했다. 울타리 바깥에서 고래가 냐앙냐앙 울고 있으면 전원주택 할머니는 “어이구, 고래 왔어?” 하면서 먹이그릇을 들고 대문을 나서곤 했다. 할머니가 가까이 오면 고래는 “할머니! 할머니! 으냥으냥!” 울면서 할머니 앞에 납작 엎드렸다. 할머니는 그런 고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사료 한 그릇을 내밀었다. 나와 할머니가 보초를 서는 데도 녀석은 밥을 먹는 동안 혹시 다롱이와 그 일당이 나타나지 않을까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할머니가 나오자 고래는 냐앙냐앙 서럽게 울었다(위). "고래야 많이 먹어라. 불쌍한 것!"(아래).
한번은 울타리 바깥 채마밭에서 고래가 밥을 먹고 있는데, 팬더 고양이(꼬맹이)가 나타나 그 꼴을 못보겠다며 고래를 내쫓았다. 고래는 그렇게 쫓겨서 또 밭가의 느티나무 그늘을 지나 묏등 너머 덤불 속으로 피난을 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전원고양이 소냥시대 네 마리의 노랑이 수컷들은 고래 이모에게 여전히 우호적이었다. 고래가 울타리 바깥에 나타나면 녀석들은 일제히 달려가서 이모에게 볼을 부비고 뽀뽀를 했다. 그런데 이 우호적인 관계가 어쩌면 녀석들이 수컷으로써의 관심이란 의심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발정이 난 녀석들은 남매인 고등어 암컷을 두고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여러 번 다툼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네 마리의 수컷 노랑이가 고래 이모의 뒤를 줄레줄레 따라다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심지어 녀석들은 고래의 은신처인 묏등 너머 덤불 속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밭에서 할머니가 주고 간 밥을 먹고 있는 고래(위). 그러나 팬더 고양이가 나타나 그런 고래를 쫓아내고 말았다(아래).
엊그제는 소나무밭에서 따로 고래를 만나 밥상을 차려주었는데, 이 녀석 허겁지겁 먹는 꼴이 이제는 길고양이의 모습이 역력했다. 고래등에 난 상처도 꽤 많이 아물어 있었다. 녀석은 이렇게 챙겨줘서 고맙다고 쟁기질이 끝난 콩밭 이랑에서 마치 흙목욕이라도 하는 듯 한참이나 발라당을 했다. 그러고는 밭가에 앉아서 오래오래 계곡만 바라보았다. 나중에는 마치 자신이 지금 머무는 은신처를 보여주겠다는 듯 나를 데리고 묏등 너머 덤불숲까지 갔다. 덤불 속 은신처는 꽤 아늑해보였으나, 비가 오면 오는 비를 어쩌지 못하는 허술한 지붕이었다. 녀석은 그렇게 몸을 가려줄 지붕도 없고, 폭신하게 몸을 누일 둥지도 없는 대책 없는 길고양이가 되었다.
팬더와 다롱이에게 쫓겨서 은신처로 돌아가는 고래의 뒷모습. 노랑이 수컷들이 뒤따르고 있다.
사실 녀석이 머물고 있는 덤불 둥지 인근에는 문을 닫은 축사 하우스가 있는데, 전원주택에서 쫓겨난 산둥이도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던 고양이가 산둥이(순둥이)여서 할머니는 내가 전원주택에 갈 때마다 산둥이 얘기를 하곤 했다. “고래는 그래도 이 선생이 올 때마다 여기 와서 밥을 먹고 가지만, 순둥이는 요새 아예 얼씬도 안해요. 얼마 전에는 한 사흘 집 앞을 찾아와 내가 사료를 멕여 보냈는데, 하이구 바싹 말라서 뼈만 앙상한 게.... 그걸 보고는 내가 막 눈물이 나더라구. 내가 몇 번이나 저기 축사까지 따라가서 밑에다가 이래 사료를 놓고 오고 그랬다구.”
전원주택에서는 할머니가, 바깥에서는 내가 따로 고래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있다.
언제까지 평화로울 것만 같았던 전원고양이들의 삶은 이렇게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이곳에 살던 고등어 수컷들과 산둥이, 고래 등을 쫓아낸 ‘다롱이의 난’은 어쩌면 전원주택의 적절한 묘구밀도를 조절하기 위한 불가피한 ‘쿠데타’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소냥시대의 암컷 고등어마저 현관 앞 둥지에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이곳에 새로 열두 마리의 새끼가 태어난 것이다. 다롱이가 밉긴 해도 그건 그들만의 질서와 법칙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쫓겨난 고양이들이 언제든 이곳에 와서 허기라도 면하고 가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곳에 다시 들어와 살 수는 없을지라도 다롱이가 녀석들에게 너무 야박하게 굴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따로 사료를 챙겨줘서 고맙다고, 내 앞에서 발라당을 하는 고래(위). 은신처로 가는 길에 잠시 계곡을 내려다보는 고래(아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라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을 고래 녀석에게 들려주고 싶다.
발라당을 하느라 흙이 잔뜩 묻은 고래의 뒷모습(위). 고래의 새로운 은신처인 묏등 너머 덤불 속(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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