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눈에 비친 골목 풍경

|

고양이 눈에 비친 골목의 풍경

 

봄볕이 좋아서 오늘은 지붕에 올라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이 향긋한 바람.

조용히 눈을 감고 음미하면 어디선가 갓 돋아난 새순 냄새가 납니다.

멋진 수컷의 냄새도 바람에 실려오죠.

 

 

이번 겨울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이 골목 밖에서도 몇몇 고양이가 그 풍찬노숙을 견디지 못해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종종 나는 이 지붕과 담장에 앉아서 골목에게 말을 겁니다.

“오늘도 행운을 빌어다오!”

물론 골목이 알아들을 리 없을 테지만,

누구에라도 행운은 빌고 싶은 거니까요.

 

 

이곳을 살다 간 어르신 고양이들은 말하셨죠.

골목에도 표정이 있다고.

골목이 무슨 살아있는 생명도 아니고, 표정이 있다니요.

처음엔 그것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독립을 하고 연애를 하고 아기를 낳고 누군가를 만나고 이별하고...

그러는 동안 골목에도 표정이 있다는 걸 알았죠.

 

 

이를테면 저녁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골목은 근사하죠.

달빛이 그윽하게 비치는 골목도 센티멘털합니다.

어느 날 수컷에게 차이고 돌아온 저녁 무렵

골목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죠.

괜찮다, 괜찮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만,

사실은 골목이 나를 위로하는 소리였습니다.

이 골목에서 무수히 나는 쫓기고 쫓고, 숨고 때로 숨겨진 것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내게는 이 골목이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끔 호흡을 가다듬고 이렇게 지붕에 올라앉아

골목을 내려다보면 무심하게 감춰진 골목의 시간들이 보입니다.

이 골목이야말로 살아온 길이었고,

살아갈 묘생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곳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계란장수는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한판에 삼천원, 하면서 지나갑니다.

생선을 파는 트럭이 지나가고, 고무 다라이 파는 트럭도 지나갑니다.

한 아주머니는 한뎃부엌에서 조청을 고는지 달큰한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합니다.

책가방을 맨 아이는 총총총 집으로 돌아가고,

자전거를 탄 아저씨는 바쁘게 어디론가 달려갑니다.

 

 

저 골목 끝에 사는 흰둥이는 여기까지 와서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쥐를 물고 튀는 고양이가 있고,

몽둥이에 쫓기는 고양이도 있습니다.

시간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가 매화꽃처럼 흩날리기도 하죠.

살구나무엔 살구꽃 피고

앵두나무엔 앵두꽃이 핍니다.

 

 

참 신기합니다.

봄이 되면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듯 꽃을 피웁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예정된 봄이 오면 좋을 텐데요.

그런 세상이 올까요?

고양이에게도 봄이 올까요?

오라는 봄은 안오고 저기 사진기를 목에 건 사료배달부가 오는군요.

 

 

저 기계로 우리를 귀찮게 하는 것만 빼면 좋을 텐데요.

멍청한 사진기가 담아내는 것은 그저 고양이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정작 고양이의 실존과 묘생은 사진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진이 아니라

사료와 사랑인 걸요.

그것이 아니라면 무관심.

 

 

우리가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원하는 건 친절함이 아니에요.

무관심이죠.

그냥 지나가는 것.

모른 척 눈감아 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고마워요.

우리가 이렇게 지붕에 앉아 있거나 말거나.

담장에서 골목으로 뛰어 내리거나 말거나.

봄볕 속에서 까무룩 졸거나 말거나.

 

 

그냥 눈 감아 주세요.

이 골목처럼.

그냥 지나가 주세요.

저 바람처럼.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 트위터:: @dal_lee

명랑하라 고양이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