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하는 고양이 미스터리
매일같이 등산하는 고양이가 있다.
전원주택에서 ‘순둥이’라 불리는 고양이다.
내가 돌보는 고양이 중에도 순둥이란 이름이 있어
나는 편의상 녀석을 ‘산둥이’라 부르고 있다.
등산로 입구에 앉아 있는 산둥이.
이 녀석이 등산하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것은
지난 2월 말 눈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녀석은 OO산 등산로 팻말 앞에 다소곳이 앉아서
내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데,
내가 집으로 가려고 걸음을 옮기자
녀석은 소나무 동산으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그때는 그냥 잠시 어디를 가겠거니 하고 대수롭잖게 여기고 말았다.
산길을 올라가다 뒤돌아보는 녀석.
그런데 내가 전원주택에 들러서 그릇에 사료를 부어줄 때마다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꼭 한참 뒤에야 녀석이 나타나곤 했다.
먹이그릇에 남은 사료를 다 먹고
녀석은 다시 휑하니 전원주택 마당을 떠났다.
도대체 녀석이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하루는 녀석을 미행했다.
등산로 초입 소나무 동산 묏등 위를 거닐다 쉬는 고양이.
전원주택 마당에서 밥을 먹고 나자
녀석은 슬슬 마당을 나가 소나무 동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의 소나무 동산은 오래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멋들어지게 들어선 곳이다.
산둥이는 이 멋진 소나무 그늘에 잠시 머물렀다
비탈길을 걸어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등산로 입구에서 70~80미터 산길을 올라간 녀석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왼쪽 수풀길로 들어섰다.
내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녀석은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며
나를 따돌릴 생각으로 수풀 속으로 들어가 몸을 감추기도 했다.
이 녀석 이 묘지 앞에서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성묘를 온 건가?
녀석이 한참이나 산을 올라 도착한 곳은
산 중턱 묏등 위쪽에 빽빽하게 우거진 덤불 속이었다.
녀석은 주변을 살피더니
의심없이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미행에서도 녀석은 똑같은 코스를 따라
똑같이 덤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산행을 마쳤다.
녀석의 최종 목적지는 이 덤불 속이었다.
"따라오지 마세요."
세 번째는 참 희한한 일도 있었다.
그 날은 소나무가 멋지게 우거진 아래쪽 묏등에서 녀석을 보았는데,
녀석은 웬 묘지 앞에 앉아서 한참이나 묘지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왜 저러지?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그때야 녀석은 발길을 돌려 전원주택으로 내려갔다.
그날도 녀석은 밥을 먹자마자 등산을 시작했다.
코스는 지난번과 똑같았다.
녀석의 행방이 궁금해 미행을 해 보았지만,
녀석은 매번 똑같은 코스로 똑같은 목적지인 덤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산행을 마쳤다.
"뭐가 그리 궁금하세요?"
그렇다면 녀석은 왜 이렇게 매일같이 등산을 하는 걸까?
그동안은 녀석이 밥을 먹은 뒤에도
전원주택 마당을 떠나는 적을 못보았다.
그런데 지난 2월 말부터 녀석은 전원주택으로 밥 먹으러 왔다가
밥만 먹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혹시 녀석이 임신을 한 것은 아닐까.
임신을 해서 출산할 곳을 정리하러 가는 건 아닐까.
얼마 전 단발머리와 한두 번 만나는 것을 목격하긴 했지만,
산둥이가 특별히 배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물론 한두 마리를 배었을 때는 임신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산 중턱까지 올라온 녀석.
아니면 영역을 옮기려고 준비하는 것일까.
전원고양이 중에 나이가 많은 몇 마리는
이미 전원주택을 떠나 영역을 옮겼다고 한다.
이곳에 새끼들이 태어나 식구가 늘어나자
새로 태어난 식구들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떠났다는 것이다.
이곳의 최고령 고양이였던 호순이도
그렇게 떠났다.
녀석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이 덤불 속이었다.
그 무엇이건 나로서는 녀석의 등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출산을 할 거면 먹이가 공급되는 전원주택이 훨씬 좋은 장소일 거고
영역을 떠난 거면 왜 밥때마다 내려와서 끼니를 해결하는 건지.
이 녀석 참 미스터리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녀석이 이렇게 매일같이 등산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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