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휴양도시, 재스퍼
버스는 시원한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 재스퍼에 들어섰다. 시내 한 켠에 자리한 자그마한 중급호텔 랍스틱라지에 짐을 푼다. 짐을 푸는 창밖으로 뮬 사슴(Mule deer) 10여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귀가 유난히 긴 사슴. 마을 한가운데 사슴이 이렇게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재스퍼에서 뮬 사슴을 보거나 엘크떼를 만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도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저 당연한 현상이다.
재스퍼는 밴프를 잇는 캐나디안 로키스의 제2의 도시. 밴프의 절반 정도 관광객(약 200만 명)이 한해에 재스퍼를 찾아오는데, 관광객들에게는 더없이 조용한 휴양도시이자, '릴렉스'할 수 있는 곳이다. 처음 이 도시는 '피츠버그'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역을 건설(1911년)하고 역 주변에 호텔을 지으면서 재스퍼 휴스라는 사람이 1913년 이 도시를 '재스퍼'로 바꿔 불렀다. 이 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1930년.
재스퍼 시내와 거리 풍경. 도시 너머로 만년설로 뒤덮인 설봉이 보인다.
밴프와 달리 이 곳에는 무수한 민박집이 있다. 이곳 민박집의 룸당 가격은 70달러 안팎. 한국인이 운영하는 '할매집 민박'도 있다. 주변에는 말린 협곡과 말린 레이크, 마못 베이슨 스키장, 레이크 피라미드, 레이크 패트리샤, 트램웨이를 타고 오르는 위슬러 산, 래프팅을 즐길 수 있는 아사바스카 리버, 미에트 온천, 아름다운 방갈로식 호텔인 재스퍼 파크 라지와 호텔 앞에 보베르 호수 등이 있다. 상주인구는 겨울에 5천명, 여름에 1만명 정도.
재스퍼에서 만난 작은 교회당 풍경. 낮게 떠서 흘러가는 구름.
재스퍼 국립공원은 밴프보다 늦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지만, 그 규모는 밴프와 요호, 쿠드니 3개의 국립공원을 합친 면적보다 크다. 밴프보다는 해발이 낮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날씨도 좀더 따뜻한 편이고, 땅도 비교적 편평한 편이다. 시내에는 3개의 자전거대여소, 4곳의 낚시 렌탈샵, 재스퍼 옐로우헤드 박물관 등이 있으며, 아름다운 집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대문이 특이한 집들도 상당수. 그러나 이런 설명은 재스퍼를 제대로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한 마디로 재스퍼를 '아! 재스퍼'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과 어우러진 다운타운과 정갈한 집들, 수시로 출몰하는(?) 야생동물들, 코발트빛 하늘. 조용함. 여유. 알 수 없는 그 무엇. 그래서 '아! 재스퍼'인 것이다.
만년설 봉우리와 침엽수숲이 고스란히 호수에 잠긴 보베르 호수 풍경.
아침 일찍 랍스틱 라지를 떠나 재스퍼 파크 라지 호텔로 향한다. 가는 길에 뮬 사슴을 어렵지 않게 만났다. 운전기사는 친절하게 사슴 앞에서 나를 내려준다. 내가 야생동물만 보면 흥분하니까 이제는 알아서 동물이 나타나면 이렇게 배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녀석들은 모두 3마리였는데, 양지녘의 새로 돋은 풀을 맛있게 베어먹고 있었다. 찰칵. 다시 버스는 파크 라지를 향해 달렸다. 강 언덕에 보이는 새까맣게 말라죽은 나무에 대해 운전기사는 이런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저것이 바로 랍스틱입니다. 과거 인디언들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이정표로 삼거나 신성함을 드러내기 위해 나무에 불을 지르거나 고사시켜 새까맣게 만들었죠." 새까만 인디언의 상징물, 이정표 나무가 바로 랍스틱이라는 거다. 그러고보니 내가 묵었던 호텔이 바로 '랍스틱'이 아니었던가. 인디언의 새까만 상징 속에서 나는 까만 밤을 보낸 것이다.
재스퍼의 한 초등학교 체육시간. 줄넘기를 하고 있다.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한 재스퍼 파크 라지 호텔. 호수에 비친 만년설 봉우리와 침엽수의 반영이 그림같은 곳이다. 본체 주위로 방갈로식 집들이 보베르 (Beauvert) 호수를 둘러싸고 흩어져 있다. 이 방갈로 중에는 빌 게이츠가 묵었던 방도 있다. 호수와 전나무숲과 골프코스가 제대로 어울린 호텔. 재스퍼 파크 라지 호텔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마중나온 것은 엘크떼였다. 캐나다에 와서 엘크떼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또 흥분했지만, 드라이버는 차를 세워주지 않았다. 엘크는 늘 이 곳에 상주해 있기 때문에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나서도 언제든 엘크를 볼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재스퍼에서 만난 눈부시게 파란 아침 하늘과 구름. 도로의 후사경이 그 모든 풍경을 다 담고 있다.
호텔 앞에 펼쳐진 보베르 호수는 그야말로 달력 그림 그 자체였다.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는 내게 필름을 사정없이 소비하게 만들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호텔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호텔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자 나는 이곳에 상주하고 있다는 엘크를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엘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드라이버 가이드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섭섭함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인지 골프코스 중간쯤 나무 밑에서 이 곳을 응시하는 코요테를 대신 만날 수 있었다. 녀석은 내가 렌즈를 들이대고 한 컷 찰칵, 하는 사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재스퍼와 밴쿠버를 잇는 비아레일에서 바라본 재스퍼의 설봉.
이튿날은 하루종일 걸어서 재스퍼를 구경하며 빈둥거렸다. 아름다운 재스퍼 교회와 역전 앞 공원의 한가로운 시간들. 개와 유모차를 끌고 우체국 앞을 지나는 여자들. 우연히 들른 역전 앞 에델바이스 기념품점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재스퍼에는 모두 12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내게 명함을 건네며 다음에 오면 한번 더 찾아오라고 했다. 글쎄, 한번 더 내가 재스퍼를 찾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런 행운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음 번엔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이곳에 올지도 모른다. 재스퍼는 충분히 그럴만한 곳이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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