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황조리에 찾아온 가을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산중에 단풍은 저 홀로 물들어가고, 보는 이 없이 황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붉고 노란 단풍이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을 물들이는 산중의 가을을 나는 타박타박 걸어서 외로운 두메마을 황조리로 간다.
육백산(1244미터)이 솟아 있는 옹숭깊은 두메마을. 이 깊은 두메마을에도 가을이 찾아와서 산자락은 꽃가루가 날리는듯 곱고, 사람 떠난 마을은 쥐죽은듯 고요하다. 겨우 마을을 지키는 노인 몇은 때늦은 콩타작을 하고, 곶감을 깎아 내걸고, 겨우내 소에게 먹일 여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삼척의 전형적인 산촌의 모습을 띠고 있는 황조리! 옛날부터 황새가 많아 황새터, 황새밭이라 불려온 황조리는 덕지기, 가마실, 방우리, 성하밭, 황새터 등 여러 자연마을이 육백산 골짜기를 따라 흩어져 있는데, 특히 성하밭과 황새터는 해발 800여 미터 안팎에 자리잡고 있어 그야말로 마을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육백산의 넓은 고원지대와 기름진 땅은 옛날부터 알아주는 땅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육백산은 육백 마지기의 감자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육백 말의 조를 뿌릴 만큼 밭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황조리 가는 길에 만난 눈부신 단풍. 아무도 보는 이 없이 저 홀로 아름답다.
현재 성하밭 마을에는 여섯 가구, 황새터에는 한 가구만이 외롭게 살고 있다. 황새터에도 과거에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마을의 8만여 평 부지에 삼척대 캠퍼스 조성사업이 진행되면서 지금은 모두 마을을 떠났다. 그 옛날에는 화전민정리사업으로 부대기꾼들이 쫓겨나더니 이제는 대학 캠퍼스 조성이 남은 사람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황조리 성하밭의 산비탈 외로운 집.
솔직히 말해 이 곳에 대학 캠퍼스를 조성하는 일은 헛웃음밖에 안나오는 코미디 같은 일이다. 두메마을에 대학을 짓는다는 것도 그렇고, 캠퍼스 같은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려면 청정한 육백산의 산자락을 절단내야 하는데, 이런 절단 내는 사업을 승인한 행정절차 또한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다. 사람 사는 집 한 채에 빈집이 예닐곱 집. 마을 주변은 온통 고랭지 채소밭이지만, 이 곳의 채소농사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황조리 외딴 두메마을 농가에서 가을볕에 익어가는 곶감.
황새터에 살다 아랫마을로 내려갔다는 할머니 한 분은 배추밭을 핑계로 마실 와서 차씨네 마당에 걸터앉아 주인네와 묵은 얘기를 나눈다. 절편이며 송편, 시루떡도 내놓고 아예 갈 생각도 안한다. 두리번거리며 집 구경하는 생면부지의 나까지 불러 떡 인심을 쓴다. 산 꼭대기 집에 오랜만에 시끌벅적 사는 소리가 난다. 할머니가 데려온 개는 사냥개처럼 고원의 배추밭을 뛰어다니고, 갑자기 나타난 개에게 쫓긴 꿩도 몇 마리 꿩꿩거리며 날아간다.
황조리 덕지기에서 만난 한 할머니가 막곶감을 썰고 있다.
황새터와 덕지기 중간쯤에 자리한 성하밭도 올라가는 길이 엄청난 비탈길이다. 집이 있을 것같지 않은 산꼭대기 아래 여섯 채의 집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성하밭에 오르자 황조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을 주변에는 제법 너른 밭도 있어서 콩도 심고 더덕도 심었단다. 성하밭은 집집이 도리깨질이 한창이었다. 이옥춘 씨네 마당에서도 어머니와 아들의 도리깨질이 투닥투닥 산자락을 울려대고 있었다. 사방에 콩이 튀고, 먼지가 날린다.
황조리 성하밭 맨 꼭대기집의 콩타작 풍경.
“갈게(가을에) 소 먹는 거 뭐 우리 먹는 거 다 준비해놓고, 한겨울에는 기냥 들어앉아 살아요. 눈이 마이 올 적이는 뭐 내 가슴까지 올 정도로 눈이 와노니 여서는 다 그래 살아요.” 이씨는 열아홉 살에 시집 와 45년 넘게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살았다. 산이 높아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성하밭 사람들은 꼼짝없이 갇힌다. 마을 한가운데는 성하밭 당집이 우거진 풀덤불을 둘러썼다. 이제는 당제를 지내지 않는지 당집의 문짝은 낡을대로 낡아서 만지는 순간 내려앉을 것만 같다.
황조리 황새터의 외롭게 남은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위). 황새터의 고랭지 채소밭(아래).
그래도 황새터와 달리 성하밭은 사람이 부러 떠나지 않는 한 전형적인 두메마을의 모습을 얼마간은 유지할 것이다. 얼마간은 도리깨 타작 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들만 사는 이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나면 성하밭도 어쩔 수 없이 빈 마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이 오늘날 외딴 마을의 운명이다.
외로운 두메마을 귀틀집에 남은 설피.
산자락에 폭 잠겨서 자연의 식구가 다 된 두메마을이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누가 말리겠는가. 거기에 펜션이 들어서고, 스키장이 들어서는 것보다야 그 편이 훨씬 명예로운 최후이다. 하지만 요즘의 두메마을은 보존보다는 개발논리가 앞서고 있다. 옛 모습을 유지하는 것보다 옛 모습을 갈아엎는 게 발전이라 여기고 있다. 과연 그런가? 너와집보다 시멘트 블록집이 더 나은가? 고랭지 채소밭보다 농약범벅 골프장이 더 낫다는 말인가?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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