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잃은 길고양이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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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잃은 길고양이의 하루


우리 동네 길냥이 세계의 최고 멋쟁이 모냥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녀석은 절름발이 고양이와 형제지간이었다.

얼마 전 <가여운 절름발이 길고양이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기사를 올린 적이 있다.
거기서 절름발이 고양이를 괴롭히던 회색 고양이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이 고양이가 내가 요즘 부쩍 관심을 갖고 있는 길고양이다.


모냥이가 둥지에서 잠을 자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절름발이를 괴롭히던 회색 고양이의 만행은
아마도 과격한 장난이었던 것만 같다.
절름발이 고양이를 구조해 수의사에게 맡긴 뒤
몇 며칠이 지난 후 녀석이 살던 둥지를 찾았을 때,
그곳에는 바로 절름발이를 공격하던 회색 고양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로
둥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둥지에서 일어난 모냥이(위). 턱도 긁고 글루밍도 한다(아래).

둥지가 자리한 골목의 치킨집 청년에게 물어보니
원래 이 회색 고양이와 절름발이 고양이는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것이었다.
작년 겨울 11월 말쯤 녀석들이 태어나
줄곧 이 골목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치킨집에서는 이 녀석들에게 그동안 남는 닭고기를 먹이며 키워 왔다고 한다.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요란한 기지개를 켠다.

절름발이가 다친 뒤 2개월 넘게 회색 고양이는
이 절름발이 고양이의 보호자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절름발이를 공격하고 괴롭히던 장면은
동생에게 좀 과격하고 심하게 장난을 쳤던 것이고,
그 과격한 장난에 나는 녀석을 오해했던 셈이다.


"근데 절름발이는 어디 갔어요?" 라고 내게 묻는 것만 같은 모냥이의 눈빛.

어쨌든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가끔씩 녀석의 둥지를 찾아 200원짜리 소시지도 던져주고
고양이 통조림도 서너 번 갖다 바쳤다.
절름발이 고양이가 떠난 뒤, 약 한달 넘게
회색 고양이는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듯했다.
마실도 잘 안 나가고 둥지만 지키고 있는 모습이 자주 내 눈에 띄었다.


모냥이가 영역을 벗어나 마실 나간다. 차 밑에서 세탁소 쪽을 바라보는 모냥이(위). 천천히 길을 건너 세탁소로 걸어간다(아래).

녀석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건 최근 들어서이다.
녀석의 하루는 둥지에서 일어나 글루밍(고양이 세수)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참을 구석구석 온몸에 침을 발라 깨끗하게 단장한 뒤,
녀석은 둥지를 나와 앞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켠다.


세탁소 앞에 도착한 모냥이. 한발 늦었다. 먹이가 없다.

치킨집에서 닭고기 먹이를 놓아준 날이면
그것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먹이가 없는 날이면 세탁소 쪽으로 먹이 마실을 나간다.
녀석은 전형적인 코숏보다 다리가 길고 생긴 것도 멋져서
나는 이제껏 ‘모냥이’라 불러왔다.


텃밭 공터로 나온 모냥이.

어쨌든 모냥이는 그렇게 둥지에서 나와 세탁소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러나 먹이창고인 세탁소 앞에도
이미 다른 길냥이들이 사료를 먹은 뒤여서 남은 것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모냥이는 치킨집이 문을 여는 저녁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희봉이와 깜냥이가 노는 것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녀석은 일찍이 배를 채우고 나온 희봉이와 깜냥이 남매에게 줄레줄레 다가간다.
동네 텃밭 인근 공터가 바로 녀석들의 놀이터다.
희봉이와 깜냥이는 공터에 버려진 화분을 곡예하듯 넘어다니며 놀다가
모처럼 찾아온 모냥이를 본다.


희봉이와 깜냥이와 함께 놀고 싶어 관심 끄는 행동을 해보지만, 별로 관심이 없다.

엄연히 이곳은 희봉이와 깜냥이의 영역이므로
모냥이는 예의 두 녀석의 눈치를 보며 함께 놀자고 한다.
희봉이와 깜냥이 남매가 시큰둥하자
녀석은 텃밭 한가운데 자리한 은행나무 타기 묘기를 선보이며 환심을 사려 애쓴다.
모냥이 나무 타는 솜씨는 거의 다람쥐에 가깝다.
희봉이와 깜냥이는 신기한듯 그것을 한참 바라보기만 한다.


모냥이의 은행나무 타기 묘기. 녀석은 다람쥐만큼이나 나무를 잘 탄다.

희깜 남매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자
모냥이는 혼자서 나무 그늘에 들어가 놀다가
화분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하고
공연히 밭 둔덕에 올라가 우렁찬 고함도 질러본다.


"봤지? 가르쳐줄까?" "아니!" 그래도 관심 없는 희봉이.

이곳이 바로 절름발이 동생과 자주 놀러와 장난치던 곳이다.
녀석은 그 때의 추억이라도 생각난 듯
화분 위에 올라가 한참 절름발이와 놀던 텃밭을 내려다본다.
원래 이 녀석도 형제가 네 마리나 되었다.


마실을 접고 집으로 갈 생각을 한다.

하지만 두 마리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뒤에 죽고,
겨우 살아남은 절름발이는 다리가 다쳐
모냥이가 보호자 노릇을 해야만 했다.
그 마음이 사람과 같다면,
아마도 지금 모냥이의 머릿속에선 그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을 것이다.


모냥이가 텃밭 둔덕에 올라 오래오래 무언가를 본다. 녀석들에게도 기억이란 것이 있다면, 옛날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이다.

저녁까지는 아직도 해가 창창한데,
모냥이는 일찌감치 마실을 접고 천천히 둥지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짠해 보인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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