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륜으로 일궈낸 매혹적인 기행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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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륜'으로 일궈낸 매혹적인 기행미학
-- 김훈의 <자전거 여행>


"강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만, 길은 인간의 것이므로 마을에서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모든 길은 그 위를 가는 자가 주인인 것이어서 이 강가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과 친인척과 이웃은 흔히 상류와 하류 사이의 물가 길을 오가며 이루
어졌다. 그러므로 이 늙은 길은 가(街)가 아니고 로(路)도 아니며 삶의 원리로서의 도(道)이
다. 자전거는 이 우마차 길을 따라서 강물을 바짝 끼고 달렸다."(<시간과 강물-섬진강 덕치
마을> 중에서)

무릇 여행가는 길의 미식가다. 길의 미식가는 혀끝이 아닌 마음으로 길을 음미한다. 김훈은
그렇게 '풍륜'이란 이름의 자전거와 함께 여행을 떠났고, 떠나서 발 아픈 시간은 고스란히
길에 바쳐졌다. 자전거라는 게 그렇다. 자동차보다는 느리고, 걷는 것보다는 빠르다. 자전거
는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자동차를 타
고 휙 지나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과 사물과 아릿한 삶들이 자전거 위에서는 적당한 속도
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여행>에는 휙 지나치지 않지만 적당히 숨이 가쁠 정도
의 속도감이 숨어 있다. 그 정도의 속도감으로 그는 매력적인 문장의 고개도 유유히 넘어간
다.

"봄의 흙은 헐겁다. (중략) 언 땅이 녹고 햇볕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흙의 관능은 노곤하게
풀리면서 열린다. (중략)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
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중략) 얼고 또 녹는 물의 싹들은 겨울 흙의 그 완강함을
흔들어서, 풀어진 흙 속에서는 솜사탕 속처럼 빛과 물기와 공기의 미로들이 퍼져나간다. (중
략)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흙의 노래를 들어라-남해안 경작지> 중에
서)

햇살에 반짝이는 풍륜의 바퀴살과 힘껏 페달을 밟는 발바닥이 퍼올린 동력으로 그는 시에
가까운 문장을 도처에 풀어놓는다. 그렇다고 그가 삶을 등지고 문필가의 힘을 빌어 문장의
재주만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자전거 여행>에는 쓸쓸하고 안쓰럽고 외로운 삶들과 느꺼운
현실과 아쉬운 역사가 날것들의 풍경에 잠기고 길에 뿌려진다. 망월동에서 바라본 밥과 사
랑이 그렇고, 만경강에서 바라본 갯벌의 뻘죽한 삶과 영일만에서 만난 노동의 등불이 그렇
고, 고성의 불 탄 소나무와 소백산 의풍마을의 매맞는 소가 그러하다. 그는 풍경과 사물과
삶을 길에서 얻은 노곤한 문장의 힘으로 화해시킨다. 

알다시피 김훈은 소설가이며 기자이고, 한때는 편집국장이었다. 그런 그가 50세를 넘긴 나이
에 자전거를 저어가며 엔진이 닿지 않는 세상의 길들을 풀어 책에 옮겨 놓았다. '여행'이란
이름표를 달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 책에는 역사와 지리, 문학과 철학, 매 맞는 소와 때리는
인간의 사랑이 구구절절 차고 넘친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자전거 여행>을 두고 기행문학
의 진수라고 표현했고, 나 또한 그것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여행서라고 해서 꼭 여행지 안
내와 먹고 자고 노는 코스를 충실히 따를 필요는 없다. 그런 건 관광안내책자에 다 나와 있
다. 그런데도 여전히 똑같은 코스를 재탕, 삼탕하는 여행서들이 너무 많다는 건 슬픈 일이
다. 더욱이 그런 여행서의 필자들이 여행가를 자처하는 것도 안된 일이다.

김훈의 미학을 다시 따라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모름지기 여행가란 '작가'나 '건축가'처럼 짓
고 만들어 '일가'를 이루어야 하리라. 새로운 여행을 만들고, 발굴하고, 개발하고, 엮어내야
할 여행가가 맨날 그 밥에 그 나물인 닳고닳은 여행지를 지겹도록 안내해서는 '가'를 뒤에
붙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소설가 김훈은 그가 사양할지라도 진정한 여행가인 셈이다. 그
의 책에서는 바람냄새, 흙냄새, 땀냄새가 난다. 구불구불하고 살가운 길의 실루엣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삶을 비켜가지 않고, 멀리서 그저 바라보지도 않고, 곧장 그 속으로 뛰어드는 그
가 책 속에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김훈을 알지 못한다. 그가 '가부장적 보수'와 놀아났든, '아름다운 마초'이든 내가 기억하고 싶은 김훈은 '풍륜'으로 일궈낸 땀내 나는 기행과 자전거 바퀴살처럼 빛나는
길 위의 산문이다. 그는 말한다.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
다." <자전거 여행>은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말한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
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
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설령 그가 패배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가엾은 수사학'처럼 너무나 아
름다운 패배였으리라.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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