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 고양이
하얀색과 보라색 꽃이 넘실거리는 도라지꽃밭이다.
어린시절 시골집 뒤란을 물들이던 도라지꽃밭이다.
어린 내가 꽃이 피기 직전의 꽃망울을 터뜨리며 놀던 도라지꽃밭이다.
언젠가 왕피리 여행 가서 끝없이 펼쳐진 꽃물결을 보며 황홀해하던 도라지꽃밭이다.
일렁이는 도라지 꽃밭 너머로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온다.
도라지꽃 너머로 앉아 있는 승냥이의 실루엣.
여울이다.
녀석은 고추밭 이랑을 지나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도라지밭으로 왔다.
골목의 트럭 밑 그늘에 앉아 있다가
내가 도라지꽃 구경하는 걸 보고는 궁금해서 따라왔다.
잠깐 녀석은 내가 꽃구경하는 것을 구경하더니,
에이 재미없어, 하면서 가버린다.
하얀색과 보라색 꽃물결이 일렁이는 도라지밭 너머로 보이는 고양이는 그저 앉아만 있어도 낭만적인 그림이 된다.
아랑곳없이 나는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서 땀도 식히고,
도라지꽃도 구경한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당돌이 녀석도 저쪽 골목에서 슬금슬금 걸어와
도라지 꽃밭 가에 앉았다.
아마도 여기서 기다리면 먹이라도 줄 거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승냥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 도라지꽃밭을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였다.
당돌이 녀석, 이제 성묘가 다 되어서 의젓해졌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커갈수록 제 어미였던 까뮈를 쏙 빼닮았다.
나는 살구나무 그늘에, 녀석은 밭가에 세워진 트럭 그늘에서
도라지꽃을 구경한다.
뒤늦게 당돌이와 순둥이를 괴롭히며 봄부터 초여름까지 영역싸움을 벌였던
승냥이가 왔다.
자신의 영역인 도라지밭 가에 나타난 당돌이에게 으르렁거리는 승냥이(위)와 도라지밭에서 '밥은 안 주나' 하고 기다리는 당돌이(아래).
이 녀석 도라지밭으로 오더니 다짜고짜 트럭 밑에 앉은 당돌이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두어번 그렇게 당돌이를 위협하더니
혼자서 조용히 도라지밭을 기웃거린다.
꽃밭 너머로 제법 낭만적인 자세도 취한다.
이 녀석 당돌이네와 여울이네 밥을 제 밥처럼 빼앗아 먹더니
안하무냥으로 ‘길 위의 법칙’도 무시하고 살더니
이제 좀 잠잠해진 편이다.
도라지꽃밭을 향해 걸어오는 여울이(위)와 도라지밭에서 본 고추밭의 여울이(아래).
오랜 영역싸움 끝에 녀석은 골목의 초입,
그러니까 도라지꽃밭이 있는 컨테이너 인근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곳은 왼쪽 위로 당돌이네, 오른쪽 위로 여울이네,
뒤쪽으로는 옛 축사냥이네 영역과 만나는 중간지대라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쉬고 있는 살구나무 그늘과 도라지꽃밭이 바로 승냥이 영역인 것이다.
이 녀석도 당돌이와 순둥이처럼 공터 급식소에 두 마리의 개를 묶어놓는 바람에
그곳을 떠나 도라지밭 인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으냐앙~~~~"
승냥이 녀석은 여전히 도라지밭 구석구석을 기웃거린다.
가만 보니 이 녀석 도라지꽃을 구경하는 게 아니었다.
도라지꽃밭에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를 좇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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