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임박한 왕초고양이는...
“바람이가 더 안좋아졌어요. 목 아래로 다 마비가 온 상태구요... 이제 스스로 먹을 수도 없게 됐어요. 지금은 주사기로 유동식을 먹이는 상태에요. 아무래도 이대로는 오래 가지 못할 것같아요.” 지난 금요일 고보협의 천랑 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바람이를 옮긴 병원에 들러 몇 시간이나 아픈 바람이 곁을 지키다 온 천랑 님이 내게 바람이 소식을 전한 거였다. 바람이의 상태가 더 안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일말의 기적을 기대했던 나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튿날인 토요일 오전 나는 집에서 2시간 거리인 병원을 찾았다. 고보협의 천랑 님과 감자칩 님이 동행을 해주었고, 뒤늦게 아톰 님(천랑 님과 함께 처음 병원에서 지금의 병원으로 바람이를 후송해 주었다)까지 찾아왔다. 모두 바람이를 위해 나보다도 더 애쓰신 분들이다. 새로운 병원으로 바람이를 옮긴 것도, 찾아가서 눈을 맞추고 간병을 해준 것도 그 분들이다. 사실 병원을 옮긴 뒤로 나는 처음으로 병원을 찾은 거였다. 병원에 도착해 원장님께 인사를 드리기가 무섭게 원장님은 바람이가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드르르 문이 열리자 그 안에 바람이가 혼자 쓸쓸하게 누워 있었다.
"모두모두 응원해 주셔서 야옹합니다"
“임마, 나 알아보겠냐?” 가늘게 눈을 뜬 바람이가 코를 벌름거리더니 잦아드는 목소리로 아웅, 아웅 울었다. 그러고는 조금 더 눈을 뜨더니 나와 한참이나 눈을 맞췄다. “이 녀석 알아보네요. 바람이는 지금 경추 아래로 마비가 온 상태이고, 계속 진행되고 있어요.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 녀석이 주사기로 유동식을 넣어주면 잘 받아먹고, 변도 잘 본다는 거예요. 그래도 녀석이 기초체력이 좋아서 이만큼이나 견뎠지, 그렇지 않았으면...” 원장님은 바람이를 꺼내 현재의 상태를 설명했다. 혼자서는 걷지도, 서 있을 수도, 먹을 수도 없다. 거의 ‘식물고양이’ 상태가 된 셈이다. 이런 경우 왕초고양이의 상당수는 생을 포기하고 먹는 것조차 거부한다고 한다. 하지만 바람이는 아직도 생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얼마나 갈까요?” “오래는 못갈 겁니다. 일단 스스로 먹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바람이가 여전히 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원장님도 나도, 함께 온 천랑 님도 감자칩 님도 ‘안락사’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목 아래로 마비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꼬집으면 살짝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눈은 오히려 구조할 때보다 상태가 좋아져 고름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얼굴은 훨씬 좋아졌으나, 몸은 훨씬 나빠진 셈이다. 처음 병원에 옮기던 날에 비해 눈빛도 많이 순해졌다. 행동도 얌전해졌다. 하긴 발톱을 세우고 싶어도 이젠 세울 수가 없다. 하악질을 하고 싶어도 ‘하악’하는 시늉만 간신히 낼 뿐이다. 그동안 바람이는 눈물겨운 투병생활을 해왔다.
목 아래 마비가 된 상태로 누워 나와 눈을 맞추는 바람이.
녀석을 구조해서 병원으로 옮긴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었다. 그러는 동안 바람이는 여러 번의 혈액검사와 변 검사를 받아야 했고, 상태가 심해져 병원을 옮기기까지 했다. 녀석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안좋아졌다. 처음엔 뒷다리에만 마비가 오더니 지금은 목 아래 전체가 마비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 캔 정도는 먹을 수 있더니 이제는 스스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이 녀석 처음 병원에 머물 때에 비해 불안한 기색이나 두려움은 많이 줄어들었고, 치료에도 매우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천랑 님과 감자칩 님은 녀석의 표정이 많이 편안해졌다며, 모두들 이렇게 아픈데 저렇게 참아내는 걸 보면 대견하다고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내가 보기엔 녀석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예감한 녀석이 담담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으로 비쳤다.
어쨌든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 아니, 이미 결정은 내려져 있었다. 함께 온 사람들 누구도 안락사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감자칩 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제가 돌볼게요. 병원에서도 가까우니 응급상황이 오면 병원에 곧바로 올 수도 있고. 봄이아빠 님이 자원봉사도 해주신다 하고. 구름 님 동네에서도 왕초고양이였으니, 가는 날까지도 왕초고양이답게 보내야죠. 월요일날 퇴원시켜 데려갈게요.” 지난 번 통화 때 천랑 님이 고보협에서 돌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귀띔을 받긴 했지만, 감자칩 님의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최악의 경우인 안락사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반신 마비에 기생충 감염 가능성이 있는 녀석의 입양자를 찾는 일도, 제자리에 방사하는 일도 힘든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고양이 보고서>를 방문하는 많은 독자들은 아직 바람이를 보낼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듯했다.
목 아래로 마비가 되어 더이상 혼자 걸을 수도, 먹을 수도 없게 되었지만 도리어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온 바람이.
그때 감자칩 님이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다. 고양이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 감자칩 님은 그렇잖아도 집에서 임시로 돌보는 고양이가 10여 마리가 훨씬 넘는다. 그런데도 바람이의 소식을 접하고 선뜻 얼마 남지 않은 바람이의 생을 맡아보겠다고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바람이가 마지막 가는 날엔 구름 님이 꼭 옆을 지켜주세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결정을 바람이도 이해한 걸까. 우리집 테라스에서 정신줄 놓고 자던 그 옛날처럼 녀석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신 6개월째인 아내가 자꾸만 함께 오겠다는 것을 나는 집에서 쉬라고 만류했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 며칠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아내였다. “이 지구별에서 자기와 바람이가 만난 게 기적이고, 그 많은 고양이 중에 하필 바람이가 우리집을 찾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야. 그러니까 기적은 이미 일어난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바람이가 왕초고양이답게 스스로 마지막을 택할 수 있게 된 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인 것이다. 설령 바람이가 고양이별로 돌아가더라도 녀석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도 고양이에게 이 별은 꽤 친절한 별이었다고.
* 그동안 바람이를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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