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밭의 봄고양이
오랜 기다림 끝에 봄이 와서
축사 언저리 파밭에도 대파가 새파랗다.
4월의 때아닌 눈과 한파에도 대파는 두 뼘 남짓 웃자랐다.
날씨가 풀리고 봄 햇살이 따뜻하게 논두렁에 쏟아져 내리면
축사고양이들은 어슬렁어슬렁 습하고 어두운 축사를 벗어나
논두렁과 파밭을 거닐며 봄을 만끽한다.
"이게 무슨 맛일까?" "우아~앙 뭔 맛이 이러냐..."
봄은 역시 고양이의 계절이다.
봄이 되면 모든 고양이들은 생기에 넘친다.
골목이나 들판에서 마주치는 고양이의 눈동자마다 봄 햇살이 그득하다.
어떤 고양이의 눈에는 꽃다지가 일렁이고
어떤 고양이의 눈에는 제비꽃이 초롱하다.
파밭을 거닐다 파밭가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여리(앗, 파를 깔고 앉았네).
이맘때 축사고양이의 눈에도 푸른 파밭이 넘실거린다.
특히 생애 첫 봄을 맞는 여리에겐
봄의 모든 변화가 궁금하기만 하다.
파밭을 따라 종종종 걷다가도 ‘이게 먹는 건가’ 하고
잠시 파 끝을 혀에 대보기도 하고,
용감하게 앞니로 아사삭 한입 씹어본다.
축사 경계에서 파랗게 일렁이는 파밭을 바라보는 미랑이의 눈.
하지만 곧바로 ‘우앙, 뭔 맛이 이러냐’ 하면서
혀를 날름 내민다.
나는 파밭 가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 파 씹은 표정을 웃으며 본다.
봄이 되면서 축사고양이 가족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혹독했던 지난 겨울 제리와 노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지만,
다른 고양이들은 무사히 겨울을 넘겼다.
축사고양이 대모와 미랑이가 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위). "밥은 갖고 왔어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대모의 모습(아래).
하지만 햇살이 따뜻한 봄이 되면서
몇 마리는 분가를 시킨 듯하다.
어미인 대모가 배가 불룩한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장차 태어날 새끼들을 위해
어미는 이곳의 고양이 밀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파밭을 거니는 대모(위). 파밭 속으로 들어가려는 가만이(아래).
현재 축사에 붙박이로 정착하고 있는 고양이는
어미인 대모를 비롯해 장나니와 여리, 미랑이, 가만이 등 다섯 마리다.
보리와 소리는 이따금 찾아와 허기를 채우고 간다.
뜨문이와 나리는 최근 1개월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대신에 흰털노랑이가 한 마리 대모의 낭군으로 자주 찾아오는 편이다.
파밭 위의 식사? 파밭 너머로 보이는 축사냥이의 식사시간.
여리가 파밭에 지대한 관심을 두는 반면
대모와 장나니, 미랑이와 가만이는 그저 시큰둥하다.
녀석들은 ‘저건 못 먹는 거야’ 하면서 관심도 없이 지나치곤 한다.
그래도 파밭에 가지런히 대파가 솟아난 봄 풍경 속에 앉아 있는
녀석들은 천상 봄고양이다.
그래서 싫든좋든 녀석들은 파밭과 꽤나 잘 어울린다.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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