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에서 제주도가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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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에서 제주도보인다고?




추자도에서 제주도가 보인다고?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추자도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추자도 신양리라는 곳. 추자도에서도 오직 이곳에서만 제주도와 한라산이 보인다. 그러나 추자도에서 제주도와 한라산이 보이는 날은 열흘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은 맑은 날이라도 해무가 끼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날씨가 맑은 날이어야 제주도가 보이는 것이다. 때마침 운 좋게 나는 그날에 맞춰 추자도를 찾았고, 신양리에서 바다 너머로 보이는 제주도와 한라산을 사진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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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신양리 언덕에서 바라본 제주도와 한라산. 바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자락이 한라산이다. 추자도에서도 이렇게 제주도가 보이는 날은 1년에 열흘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추자도는 해남과 제주도 본섬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섬이다. 상추자, 하추자, 횡간도, 추포도 등 4개의 유인도가 있으며, 주변에는 무려 38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가 추자도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후풍도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조선시대 때는 추자나무가 숲을 이루듯 무성했다고 추자도라 불렀다. 반달 모양의 대서리 추자항에 배가 닿은 시간은 4시 30분. 항구마을인 대서리는 생각보다 번화해서 마치 잘 나가는 지방의 바닷가 소읍을 옮겨놓은 듯 생기가 넘친다. 식당과 여관과 다방의 간판도 생각보다 많아서 뭍에서 2시간 반이나 달려온 섬이라고는 느껴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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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신양리 포구. 미역 말리기가 한창이다.

항구가 자리한 대서리 뒷산에는 유서 깊은 최영 장군 사당이 있다. 상추자 사람들은 음력 2월 보름날 영흥리 산신당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나서 이곳 최영 장군 사당에서 장군제와 해신제를 지낸다. 사당 안에 모셔둔 최영 장군의 신위에 ‘조국도통대장 최영장군 朝國郡統大將 崔塋將軍’이라 씌어진 것을 보면 추자도에서는 예부터 최영 장군을 수호신으로 여겨온 것이 분명하다. 해송이 우거진 숲속에 그윽한 옛빛으로 남아 있는 최영 장군 사당에서는 상추자의 대서리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여기서 사당 위쪽으로 더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새떼처럼 흩어진 추자군도의 크고 작은 섬들과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드넓게 펼쳐진다. 섬 뜬 풍경 사이로 손톱만한 어선들이 구름처럼 유유히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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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초리에서 바라본 횡간도와 추포도.

대서리는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와 숙식업소, 유흥업소가 몰려 있는 추자도의 중심마을이다. 그러나 추자도의 진면목을 만나려면 대서리를 벗어나 연도교로 연결된 하추자 쪽으로 가는 게 좋다. 수시로 버스가 다녀 이동에는 불편이 없다. 추자교 건너 묵리, 처녀당을 지나면 신양리가 나오고, 신양리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예초리다. 묵리에서 신양2리로 이어진 하추자의 해안도로는 추자도의 비경을 연달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때마침 신양1리 선착창에서는 돌미역을 나르고, 말리고, 거두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선창가에서 만난 한 어부에 따르면 신양리에는 모두 50명 남짓의 해녀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자연산 돌미역 채취에 매달리고 있으며, 부수적으로 소라와 전복을 채취하고 있단다. 그에 따르면 신양리 외에도 묵리에 30여 명, 예초리에 30여 명, 대서리에 20여 명, 영흥리에 20여 명, 그러니까 추자도 전체에 대략 150여 명의 해녀가 있다고 한다. 단위 면적당 생업에 종사하는 해녀수로 따져보면 제주보다 해녀밀도가 훨씬 높은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의 해녀가 현재 대부분 40~75세인데다 물질을 하려는 30대가 거의 없어 해마다 해녀수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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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리 최영장군 사당에서 바라본 추자도 앞바다와 추자군도의 섬들.

해질 무렵이 되자 드디어 앞바다에 나갔던 해녀들이 저마다 어선을 타고 돌아왔다. 해녀가 짊어진 종망태마다 돌미역이 그득하다. “이 미역은요 먹어보믄 미치고 반히여. 이런 맛은 여서만 난다케. 이걸 생으로 쌈 싸 먹으면 옆이서 어매가 죽는지 아배가 죽는지도 모르요." 금방 배에서 내린 해녀 윤처임 할머니의 말이다. 할머니는 열 몇 살에 물질을 시작해 한 50년 정도 물질을 했다고 한다. “다른 디 미역은 돌미역이 아니라 줄미역이여. 여기 것은 디쳐서 쌈 싸먹어도 좋고, 말리서 송송송 썰어넣고 소고기 넣어 국 낋이면 한 그륵 뻐쩍히여." 사투리로 보아서는 전라도인게 분명하다. 사실 이 곳의 행정구역은 제주도에 속해 있지만, 모든 생활방식이나 언어와 풍습, 생활권은 전라도에 더 가깝다.

해가 넘어갈 무렵인데도 신양2리 푸랭이섬 앞바다에는 해녀의 물질이 끝나지 않았다. 바닷가 석지머리에는 두 명의 해녀가 아직도 물질을 하고 있다. 금빛으로 물든 바닷물 속에서 해녀가 자맥질을 할 때마다 금빛 물살이 튕겨오른다. 결국 해가 지고 나서야 해녀는 돌미역을 안고 뭍으로 올라왔다. 신양1리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장작지 포구 너머로 달이 뜨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월출이었다.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월출은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감동이었다. 검고 푸른 물결과 그 위에 뜬 어선들 사이로 달이 떠서 노란 달빛이 그대로 바다를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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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의 아름다운 일몰.

신양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걸어서 예초리로 넘어간다. 고개를 넘어서자 엄바위(엄지손가락을 닮았다) 밑에 억발장사(목장승)가 멀리 횡간도 쪽을 바라보고 있다. 예초리에서 만난 김원순 노인에 따르면 이곳에 모신 억발장사는 횡간도로 건너뛰다 죽었다고 한다. “저 장성이 들돌을 가지구 엄바구 밑에서 꽁놀기(공기놀이)를 하다가 횡간도로 건너뛰다 죽었다드마. 옛날에는 저 장성 아랫길이 소로길이여. 동백낭구가 우거져 하늘이 안보일 정도였어. 그걸 길 내니라고 다 쳐버렸소. 그 낭구 칠 때 거기서 피가 났대. 옛날 추자에는 낭구가 많았어. 뗏목을 만들어 제주도에두 가구 그런 시절이 있었지." 이곳의 억발장사는 키가 2.7미터 정도이며 생김새는 육지의 목장승과 다르지 않다. 예초리 사람들에 따르면 이 장사는 한번 세우고 썩어버리면 다시 세우기를 이제껏 계속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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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저쪽으로 떨어지는 낙조. 석양을 배경으로 저녁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

예초리는 횡간도가 건너다보이는 추자도의 끝자락이다. 종종 낚시꾼들은 이곳에서 낚싯배를 빌려타고 횡간도나 추포도로 넘어간다.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섬, 그 섬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섬으로 가는 길목에 나는 와 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저 섬으로 갈 것이다. 예초리에서 낚싯배 영업을 하는 선장은 낚시도 안 할 거면서 횡간도에 왜 가려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알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낚시도 안 하는 사람에게 낚싯배는 왜 빌려주겠다는 건지. 어차피 여행이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가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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