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 배 타고 가는 섬
1박2일에 이번에는 만재도라는 섬이 나왔다. 내가 이미 블로그와 <물고기 여인숙>이란 책에서도 소개한 만재도라는 섬. 배 타고 5시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루하게 배를 타야 닿을 수 있는 섬. 뭍사람이 가장 가기 어려운 섬. 목포에서 105킬로미터 떨어진 절해고도의 섬. 그곳이 만재도(晩才島)다. 그 먼 섬을 1박2일이 다녀왔다는 데에 일단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만재도는 본래 재물을 가득 실은 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예부터 뭍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먼데섬’이라 불리던 곳.
아침 8시에 목포에서 떠난 배는 점심 무렵인 1시가 넘어서야 만재도 선창에 닿았다. 사실 만재도 선창은 몸집이 큰 여객선을 수용할 수 없어 여객선이 도착하면 선창에서 종선이 나와 손님을 실어나른다. 손님이라고 해봐야 대부분은 갯바위 낚시꾼이 고작이다. 그래도 낚시꾼들에게는 만재도가 농어나 우럭, 놀래미, 볼락의 손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섬이다. 이런 망망대해에 이런 섬이 있었다니! 만재도에 도착하자 잦아드는가 싶었던 장맛비가 또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밀려온 해무는 섬을 온통 뒤덮더니 베일을 벗듯 한꺼풀씩 벗겨져 해안에 머물렀다.
민박집에 짐을 풀어놓고 나는 빗속을 걸어 무작정 떠돌았다. 섬 특유의 돌담이 구불구불 산비탈을 따라 계단처럼 이어져 있다. 이곳의 돌담길은 미로처럼 구획되어서 생각없이 헤매다보면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렇게 복잡한 미로형 돌담길은 완도군의 여서도와 이 곳 만재도가 단연 으뜸이라 할만하다. 몸이 가는대로 나를 맡기고 올라간 곳에서 만난 김화예 할머니 댁은 거의 마을 꼭대기쯤에 자리한 집이었는데, 마치 복잡한 미로형 골목은 이 집을 찾기 위한 길인 듯했다. 내가 헛기침을 하고 들어서자 할머니는 부엌에 웃달린 다락방에서 세간을 정리하다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마루에는 제사 때 쓰던, 칠이 벗겨진 오래된 목기며, 놋그릇이 바구니마다 담겨 있었고, 발짱(김을 말리는 김발), 딱가리(멸치나 생선을 말리는 일종의 채반), 바구리(해산물을 나르거나 담는 둥그렇고 큰 바구니), 옹딩이(작은 바구니)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어찌보면 참 옹색하기 그지없는 다락방이지만, 내 눈에는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다락방이라는 공간이 푸근한 고향의 정서적 공간으로 다가왔다. 할머니는 난데없는 객이 마루로 올라서자 다락방에서 내려와 철푸덕 마루에 나앉는다.
“내 스물셋에 요리 시집왔지라. 여서는 땅이서 해묵고 살게 없어라. 그 전이는 시방 묵어진 밭이다 보쌀(보리쌀) 및 말썩 해 묵고, 그래 살았지라. 여 온께 여 아들은 일궈여덟만 디두 바다에 나가서 물에 폭 들어갔다 쏙 나오고 그라드라고. 내는 물 속에 발 당금서 살 자신 없습디다. 넘들은 바다에 까꿀루 들어갔다 올케 나왔다 허민서 미역을 비서 해먹구 사는디, 내야 갱변을 가드라도 히엄바를 못칭께루 발등에 물만 쟁기면 죽지라. 그래 이래 여서 포도시 고냥에두 못가고 어렵게 살어라.” 할머니는 조도면에 있는 옥도라는 섬이 고향이란다. 지금 다락방이 있는 할머니 집은 할머니가 시집 올 때 꺼보쌀(겉보리) 한 가마니를 주고 산 집이란다.
할머니는 손님 접대를 한다며 바구니에서 말린 ‘전대미’를 한 두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전대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냥 전대미라며 못 먹을 거 주는 게 아니니까 받으라고 한다. 안 받는 것도 민망한 듯하여 나는 그냥 말린 전대미를 받았다. 전대미는 아무래도 전갱이의 사투리인 듯했다. 비는 참 억세게도 퍼부어댔다. 섬을 돌아다닌 잠깐 동안에 내 몸은 다 젖었다. 비나 피하자고 이번에는 만재분교 인근 김정섭 할머니댁으로 들어서는데, 사랑문 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일면식도 없는 나를 들어오라고 한다. 오래 섬 여행을 하다보면 이렇게 들어오라고 부르는 손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할머니, 선반에 저것은 뭔가요?”
"잉, 귀신 모신 집이여!"
그것은 신주(神主)를 모셔놓은 ‘귓것단지’라는 거였다. ‘귓것’은 뭍에서의 신주나 다름없는데, 대략 직계 조상으로 증조부모까지의 신위를 모신 선반형 나무상자로 보면 맞다. 과거에는 작은 옹기나 대그릇에 쌀을 담고 봉해 시렁 위에 두고 모셨지만, 지금은 대부분 선반을 두고 그 위에 여닫이문을 한 나무상자를 짜맞춰 문 안에 위패를 모셔둔 형태이다. 제사 때나 명절 때면 이 문을 열고 제를 지내며, 상은 선반 아래 차려놓는다. 할머니 댁에는 안방에 삼신 바가지도 있었고, 창호지를 바른 멋진 쪽문과 칠이 벗겨진 뒤주, 옷을 걸어놓는 횟대도 안방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당에는 만재도의 모든 집에서 볼 수 있는 빗물받이 ‘도가지’(항아리)가 빗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만재도 마을 앞은 몽돌밭이다.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갈 때마다 차르르, 차르르 몽돌 구르는 소리가 마을까지 들려온다. 몽돌 해변을 끼고 왼편에는 선창이 있고, 오른편에는 반도처럼 나앉은 해벽 봉우리가 길게 펼쳐져 있다. 선창에서 왼쪽으로 돌아 큰산밑에 이르면 누군가 조각해놓은 듯한 수직으로 솟은 주상절리 해벽이 펼쳐진다. 만재도의 풍경은 마을에서 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마을에서 곧바로 마구산(정상 177미터) 자락을 넘어가 만나는 외마도와 내마도 등 무인도가 솟구친 움퉁개와 오동여 풍경이 그만이다. 여기서 보면 만재도의 섬 모양은 자루가 달린 망치 모양(T)을 쏙 빼닮았다. 섬이 작은 탓에 찬찬히 마을을 둘러보고 뒷산에 올라도 반나절이면 족하다.
<여행길>
목포여객선터미널(061-240-6060)에서 08:00에 운항하는 배를 타야 한다. 소요시간 4시간 40분~5시간 정도. 여객선이 가거도를 들렀다가 온다. 하태도와 마찬가지로 여객선이 선착장에 닿을 수 없어 종선이 승객을 실어나른다.
* http://gurum.tistory.com/
* 트위터 고양이 발전소:: @dal_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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