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했던 길고양이 구조, 3일간의 기록
일요일 저녁입니다. 처음 보는 노랑이 한 마리가 테라스 아래 앉아 있습니다. 하루에 여러 번 집을 찾는 길고양이 바람이를 위해 내어놓은 사료를 몰래 먹는 고양이. 그런데 가만, 자세히 보니 이 녀석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양쪽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덕지덕지 눈곱이 끼어 있습니다. 사료를 먹는 모습도 꽤나 힘들어 보입니다. 걸음걸이도 시원찮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틀거리더니 몇 걸음 걷다가 옆으로 픽 쓰러집니다. 안되겠다 싶어 방안에서 박스를 하나 꺼내다가 임시 은신처를 만들어 테라스 안으로 넣어줍니다.
비틀거리며 대문의 나무계단을 올라오는 고양이. 몸을 잘 가누지 못해 오는 동안 몇번이나 쓰러졌다.
힘겹게 사료를 씹어 먹던 고양이가 박스를 넣어주는 내 손길에 놀라 저만치 비틀비틀 달아납니다. 그래도 녀석, 아주 달아나지는 않고 테라스 저쪽 끝에서 이쪽의 동정을 살핍니다. 내가 거리를 두자 녀석은 다시 비틀비틀 사료그릇을 향해 다가옵니다. 또다시 힘겹게 사료를 씹어먹습니다. 아무래도 사료 먹는 게 무리인 듯싶어 방안으로 들어가 고양이캔을 하나 가지고 나옵니다. 그것을 안으로 넣어주니, 녀석 맛있게 먹습니다. 녀석이 캔을 하나 다 비울 때까지 지켜보다가 나는 방안으로 들어옵니다.
얼굴과 몸이 많이 상한데다 살이 빠져 처음엔 다른 고양인줄 착각했다. 자세히 보니 바람이였다.
한참 뒤, 밖으로 나가보니 녀석이 내가 마련해준 박스에 들어가 몸을 움츠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픈 몸을 쉬고 있습니다. 됐다 싶어 안심을 하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시 나와 플래시를 비춰보니, 녀석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한밤중에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다시 또 오기는 할런지... 걱정스러운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입니다. 월요일입니다. 노란 꽃다지가 흐드러진 개울가 방죽을 걸어 고양이 한 마리가 이쪽으로 걸어옵니다. 어제 본 그 녀석입니다.
고양이캔 하나를 더 가져다 사료그릇 옆에 놓아둡니다. 녀석은 어제와 별다른 차도가 없습니다. 밝은데서 보니 오히려 더 심각해보입니다. 한쪽 눈은 고름이 찼는지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 있습니다. 두 눈 다 퀭하게 들어가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 왠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눈가의 노랑줄무늬하며 먹이를 줄 때 하악거리는 습관하며 바람이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좀더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바람이가 틀림없습니다. 살이 엄청나게 빠져 야윈데다 눈에서는 고름과 눈물이 흐르고 털까지 꾀죄죄해져 다른 노랑이로 착각을 했습니다.
사료 삼키는 것을 힘들어해 고양이캔을 갖다 주자 꽤 잘 먹는다.
1년이 넘도록 먹이를 주고 살펴온 고양이를 몰라볼 정도로 녀석은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약 열흘 전만 해도 바람이 녀석은 멀쩡했습니다. 녀석은 현관 앞에 앉아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슬금슬금 뒤란으로 달아나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열흘 동안 녀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열흘 사이에 그 풍만하고 비만했던 몸은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졌습니다. 고양이가 잘 걸린다는 호흡기질환 허피스(감기)일 수도, 칼리시(독감)일 수도 있지만,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면 더 심각한 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임시로 마련해준 박스 은신처에 들어가 병든 몸을 쉬고 있는 바람이.
다급한 마음에 고양이보호협회 천랑 님께 전화를 겁니다. “바람이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아파요. 아무래도 구조를 해야 할 것같아요.” 블로그 독자로서 바람이가 제일 맘에 든다는 천랑 님입니다. “지금 바로 발판식 통덫을 퀵으로 보내드릴게요. 꼭 구조하셔야 돼요. 제가 바람이 팬인 거 아시죠?” 전화를 끊고 나서 통덫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점심 무렵이 지나 드디어 통덫이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람이 녀석은 캔을 다 비운 뒤 사라지고 없습니다. 통덫을 테라스 아래 놓아두고 이제 바람이가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서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급기야 굵은 빗줄기가 쏟아집니다. 아무래도 구조는 힘들 것같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길고양이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통덫을 거둡니다.
그러나 잠시 후 녀석은 개울가 꽃다지 방죽을 비틀비틀 걸어서 둥지로 돌아갔다.
또다시 하루가 지났습니다. 화요일입니다. 다행히 밤새 내리던 비는 새벽에 그쳤습니다. 테라스 아래 통덫을 놓아두고 무작정 기다립니다. 바람이가 올 때까지. 아침 8시가 넘어 개울가 꽃다지 방죽에 녀석이 나타났습니다. 상태는 어제와 마찬가집니다. 뒤뚱거리며 녀석이 힘겹게 방죽을 걸어옵니다.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걸어서 녀석은 대문의 나무계단을 올라섭니다. 드디어 테라스 아래 당도합니다. 마당에 앉아 나는 숨죽이고 지켜봅니다. 테라스 아래 도착한 녀석은 캔 냄새가 나는 곳으로 서서히 움직입니다. 통덫 입구에 조금 떼어 놓아둔 미끼를 조심스럽게 핥아먹습니다.
그러나 좀체 통덫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뭔가 낌새를 챈 것인지. 단지 불안한 것인지. 한참을 녀석은 통덫 주변만 빙글빙글 돌면서 냄새만 맡습니다. 보는 나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끝내 캔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바람이가 통덫 안으로 발을 들여놓습니다. 이제 녀석이 발판 앞에 놓인 캔 앞으로 다가서기만 하면 됩니다. 절걱, 드디어 녀석이 캔을 먹기 위해 발판을 밟았습니다. 동시에 통덫의 차단막이 내려옵니다. 됐습니다. 구조에 성공했습니다. 통덫에 갇힌 바람이는 잠시 몸부림을 치더니 이내 잠잠해집니다. 사실은 탈출을 시도할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제 아침 통덫을 놓아 3일만에 구조 성공. 곧바로 동물병원으로 옮겼다.
바람이 구조에 성공했다고 천랑 님에게 전화를 하자 나보다 더 기뻐하더니 괜찮은 동물병원까지 소개해 줍니다. 바람이를 구조한 통덫을 싣고 1시간 30분이나 차를 달려 동물병원에 도착했습니다. 통덫을 옮기자마자 진정제 주사를 한 대 맞고 잠시 후 검사가 시작됩니다. 피를 뽑고, 엑스레이까지 찍습니다. 한쪽 눈에 고름이 꽉 찼다며 안약도 넣습니다. 수의사 선생님은 일단 허피스나 칼리시는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복막염이나 장염도 아닌 것같고, 뼈나 관절에도 아무 이상이 없고, 아무튼 자세한 결과는 피 검사 결과가 나오는 3~4일 후에나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각종 검사를 받고, 수액을 꽂은 채 누워 있는 바람이.
검사를 다 마치고 바람이는 수액 주사를 다리에 꽂은 채 보호실로 옮겨집니다. “이 녀석이 그 동네 왕초라면서요. 생각보다는 순한 걸요.” 바람이 소문이 여기까지 난 모양입니다. “순하긴요. 밥 준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하악질하고 경계하는데요.” 남고양이 다하는 발라당도 안하고, 애교도 없는 녀석이 지금은 저렇게 축 늘어져 힘없이 누워 있습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바람이에게 왕초고양이로서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링거를 꽂고 누워 있는 왕초고양이. 왠지 웃기면서도 짠합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병명도, 어떻게 될지도. 부디 바람이가 무사히 회복돼 예전처럼 뚱한 표정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봄은 봄이로되 여전히 봄바람은 찹니다.
* 길고양이 보고서:: http://gurum.tistory.com/
'길고양이 보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40) | 2010.04.22 |
---|---|
구조된 길고양이 희귀병으로 위험 (178) | 2010.04.20 |
고양이의 개나리 꽃편지 (31) | 2010.04.17 |
고양이 파 씹은 표정 (28) | 2010.04.16 |
혼자보다 둘이 좋은 이유 (27) | 2010.04.15 |
고양이가 부엉이로 변신? (25) | 2010.04.11 |
길고양이가 꿈꾸는 전원생활 (41) | 2010.04.09 |
당신을 기다립니다 (24) | 2010.04.08 |
고수와 하수의 차이 (24) | 2010.04.03 |
고양이 보초 서는 까치가 있다고? (22) | 2010.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