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시리도록 눈부신 해안풍경
저녁 무렵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중리 해수욕장 풍경.
화흥포에서 보길도로 간다. 비릿한 바다냄새가 습한 해풍에 실려온다. 앞바다에 뜬 몇몇의 어선들은 그물을 길어올리고, 몇몇은 통통거리며 먼바다로 나간다. ‘어부사시사’라도 읊어야 제격일 것만 같은 바다. 알려져 있듯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문학과 삶이 서린 섬이다. 고산은 이곳에 세연정을 비롯해 곡수당과 낙서재, 동천석실을 남겼고, 섬에 머무는 동안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아직도 보길도에는 가는 곳마다 그의 자취가 넉넉하다. 고산은 병자호란의 어지러운 시국을 피해 보길도에 내려와 낙서재(樂書齎)라는 집을 짓고, 말년의 노후생활을 보냈다.
보옥리 공룡알 해변 가는 길, 상록수림 안에서 바라본 치도와 해변 풍경.
부용동 어귀에는 정자를 지어 손님을 접대하고 풍경을 즐기며 노닐었는데, 이것이 지난 90년 대 초 복원한 세연정(洗然亭)이다. 세연정은 담양의 소쇄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정원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사방 연못으로 둘러싸인 중심의 바위너럭 위에 조성된 운치있는 세연정에서 윤선도는 주옥같은 어부사시사를 지었을 것이고, 이따금 연못가를 거닐었을 것이다. 부용리 산자락을 빌려 들어앉은 동천석실(洞天石室)도 과거에 고산이 차를 마시며, 시회를 열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새로 복원한 탓에 옛빛과 운치는 느낄 수가 없다. 다만 부용리에서 동천석실로 오르는 길은 울창한 숲속을 따라가는데다 ‘길의 아름다움’과 호젓함이 배어 있는 길이어서 가볼만하다.
윤선도의 자취가 서린 세연정(위)과 정자마루에 앉아 풍경을 내다보는 여행자(아래).
사실 보길도는 윤선도의 자취나 문화유산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이 시린 곳이다. 특히 바닷가를 따라 내내 펼쳐지는 절경은 절로 푸른 탄성을 내지르게 만든다. 청별항에서 시작되는 해안 절경은 서쪽으로는 솔섬, 정자리, 망끝 전망대, 보옥리 뾰족산까지 24킬로미터나 계속되며, 동쪽으로는 예송리 해수욕장과 통리 해수욕장, 중리 해수욕장, 백도리까지 10여 킬로미터쯤 이어진다. 바닥이 드러난 갯벌에서 반지락을 캐거나 파래를 채취하는 서정적인 풍경도 어느 마을에서나 만날 수 있다.
과거 윤선도가 차를 마시며 시회를 열었던 동천석실.
보길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그냥 휭 지나쳐가는 정동리에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당집도 볼 수 있다. 정동리 당집에서 보면 여러 그루의 당산나무가 호위하듯 둘러싼 풍경과 고목 너머로 보이는 바다의 풍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당집 안에는 창호지를 늘어뜨린 당신의 신체(오른쪽)와 명주옷으로 보이는 흰 한복 한 벌(왼쪽)이 걸려 있다. 문짝이 낡아서 간신히 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아니라면, 전체적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보옥리 공룡알 해변. 공룡알만한 자갈이 수두룩하다.
정동리를 지나 정자리와 선창리를 돌아가면 망월봉 아랫자락인 망끝이다. 망끝에 있는 전망대는 보길도에서는 일몰 명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해질 무렵 망끝에 서면 유인도인 넙도를 중심으로 올망졸망 흩어진 무인도가 만들어내는 실루엣이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망끝을 지나면 보옥리의 청옥빛 바다와 포구와 제대로 어울린 뾰족산(195미터)이 절경을 드러낸다. 보옥리 마을을 내려가 만나는 공룡알 해변 또한 보지 않으면 후회할 풍경이다. 뾰족산 허리를 돌아 펼쳐진 공룡알 해변에는 정말 공룡알만한 크고 둥글둥글한 돌멩이와 바위가 천지로 널렸다. 마을과 해변 사이에 들어선 상록수림 안에서 바라보는 치도와 해변 풍경도 시리도록 눈이 부시다.
바다에서 바라본 섬마을 풍경과 속보이는 바닷속 풍경.
서쪽 해안도로의 끝이 보옥리라면, 동쪽 해안도로의 끝은 백도리이고, 동남쪽 끝은 예송리다. 백도리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바위에 직접 글씨를 썼다는 '송시열 글쓴바위'를 볼 수가 있다. 보길도 동쪽 끝 해안 절벽에 자리한 송시열 글쓴바위는 누군가 숱하게 탁본을 떠 갔는지 지금은 바위에 새긴 글씨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그나마 위안은 백도리 가는 길에 자리한 통리 해수욕장과 중리 해수욕장의 눈부신 풍경이다.
통리에서 볼 수 있는 천막을 씌워놓은 초가집(위)과 옛 모습을 간직한 정동리 당집(아래).
일몰 무렵이면 두 해수욕장의 백사장과 바다는 정말 금빛을 뿌려놓은 듯 환상적인 빛깔을 띤다. 그 금빛 풍경 속에서 누군가 조개잡이라도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이다. 두 해수욕장을 낀 통리에는 천막을 지붕에 씌워놓은 두 채의 초가집도 만날 수 있다. 한 채는 빈집이고, 또 한 채는 새로 지은 집 뒤에 헛간채로 남았다.하지만 내 눈에는 도치미끝보다 예송리의 마을 풍경과 사람들이 훨씬 아름답게만 보인다. 상록수림과 해수욕장과 포구가 함께 펼쳐진 예송리는 보길도에서 가장 멋진 해변마을이다.
예송리의 한 어부가 배에서 다시마를 내리고 있다(위). 예송리 해변은 천연한 다시마 건조장이다(아래).
통리와 중리의 해수욕장이 모래밭이고, 보옥리 해변이 공룡알로 이뤄져 있다면, 예송리 해변은 자잘한 갯돌밭으로 되어 있다. 여름이면 예송리 갯돌밭 해변에서는 언제나 다시마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해변은 물론 마을 인근의 밭들도 이맘때는 모두 다시마밭으로 변모한다. 예송리 앞바다 다시마 양식장에서 채취해온 다시마는 볕 좋은 해안에 널었다가 저녁에 거두어 손질을 하고 다음날이면 수협에 수매로 넘긴다. 때마침 내가 예송리에 도착했을 때 마을 앞 갯돌밭서는 배로 실어온 다시마 내리기가 한창이었다. 해변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사진 찍는 나를 보자 대뜸 밧줄이나 잡으라고 해서 나는 한참을 밧줄이나 당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은 구경꾼일 수밖에 없는 내 무안함과 미안함을 그것으로 대신한 것이다.
보길도 서쪽 해안의 일몰.
보길도를 좀 안다고 하는 치들은 보길도 최고의 풍경으로 흔히 ‘도치미끝’을 꼽는다. 도치미끝은 중리 해수욕장에서 남쪽으로 산길을 따라 끝까지 가야 하는 곳(30여 분)이다. 그러니까 백도리와 중리 사이에 반도처럼 툭 불거져 나온 해안 절벽이 도치미끝이다. 도치미끝에서는 깃대섬과 안장섬, 예작도와 소섬을 비롯해 예송리 인근의 멋진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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