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던 겨울 연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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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겨울 연평도


 

연평도에 다녀온 지도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천천히 걸어서 나는 충민사에도 가고, 조기역사관에도 가고 썰물 진 꾸지 섬에서 한참을 노닐었다. 그 때만 해도 연평도에 이런 참극이 일어날 줄 몰랐다. 연평도의 비극을 접하며 나는 몇 년전 혼자서 거닐던 연평도의 겨울을 떠올렸다. 그저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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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지섬으로 갯일 나가는 사람들.

연평도는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 카페리호는 4시간이 걸리는 먼 섬이다. 바다에서 보면 소연평도와 대연평도가 함께 보이는데, 앞에 보이는 뾰족한 산을 가진 섬이 소연평이고, 옆으로 길게 펼쳐진 섬이 대연평이다. 뱃길에서 만나는 소연평의 명물은 얼굴바위다. 소연평 등대가 있는 절벽이 바로 얼굴바위로 옆에서 보면 코와 입이 툭 불거져나온 것이 사람의 옆 얼굴을 제대로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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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전망대에서 바라본 연평도 북서쪽 해벽과 멀리 바다 너머로 보이는 북한 황해도 해주 땅.

쾌속선은 연평도에 곧바로 접안하지 않고 당섬 선착장에 사람들을 부려놓는다. 당섬과 대연평은 시멘트 다리로 연결돼 있어 걸어서 10분이면 족히 대연평에 이를 수 있다. 시멘트 다리 왼편으로는 갈매기떼가 뒤덮은 꾸지섬이 보이는데, 가끔 여기에는 두루미가 날아와 새하얗게 섬을 뒤덮기도 해 학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섬과 꾸지섬 사이는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연평도 아낙들은 자연산 굴밭이기도 한 이 갯벌을 논밭삼아 살아간다. 물때에 맞춰 이 곳에 나오면 연평도 사람들이 걸어서 또는 손수레를 끌고 삼삼오오 갯벌로 나가는 그림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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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 잠긴 연평도 조기역사관.

갯일 나가는 풍경이야 다른 섬과 무에 그리 다를까마는 이 곳의 풍경은 소연평, 당섬, 꾸지섬 등의 절경으로 둘러싸인 데다 뻘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갯것을 먹으려는 갈매기떼의 군무가 장관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여느 갯벌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시멘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난 시멘트길을 30여 분 정도 걸어가면 조기역사관이 자리한 관광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해벽 위에 우뚝 선 조깃배 동상을 지나 조기역사관으로 들어서면 그 옛날 조기 파시 시절의 사진과 함께 여러 조기 자료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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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섬 쪽에서 바라본 연평도 풍경.

관광전망대는 바로 조기역사관 옥상이다. 여기서 보면 연평도 북서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멋진 해벽은 물론 서남쪽에 뜬 소연평도와 꾸지섬도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광전망대에서는 북한 땅인 황해도 해주 땅이 코앞처럼 펼쳐져 있어 해주를 떠난 실향민에게는 그야말로 고향전망대 노릇을 한다. 바로 저 앞바다가 1999년 연평해전이 일어났던 교전지이자 NLL(북방한계선)며, 바다 건너편 땅이 바로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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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황해도식 풍어제가 열리는 섬이다. 조기파시가 한창이었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연평도 풍어제는 한달씩 굿판을 펼치는 대동굿을 열 정도로 큰 판이었다. 그 때는 소도 몇 마리씩 잡고, 소연평, 대연평 주민들이 모두 참여해 장군당에 올라 풍어를 빌었다. 연평도는 1968년까지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파시가 열리던 ‘파시의 수도’나 다름없었다. 당시 연평도에는 조기를 쫒는 어부들과 어부를 쫒는 객주와 색시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왁자하고 발 들일 틈 없이 성대한 파시를 이루었다. 그 때는 대연평뿐만 소연평 앞바다까지 배가 빼곡하게 떠서 배 위로만 걸어서 소연평까지 갈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의 조기 잡던 어부들도 연평도를 흔히 서울 다음이라 했다. ‘똥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도 연평도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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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와 새떼로 뒤덮인 꾸지섬.

“하이고, 그 때는 왜 뱃사람들이 급할 때는 해변에서 똥을 누잖어. 종이는 없고 대신 돈으로 뒤를 닦고 버렸거든. 그러니 여 개들이 그 돈을 물고 다닌거야. 그 때는 남한 일대 조깃배는 다 왔어요. 오죽하면 조금사흘 벌어서 1년 먹고 산다는 말도 있었어. 그 때 보면 수협 앞에 돈을 넣은 마대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50~60년대만 해도 여기에 술집 색시가 1000명 정도 들어왔어. 집은 다 초가집인데, 색시는 한 집에 다섯 명, 열 명 짝 깔렸었어. 그러니 조기 잡는 어부들은 여기를 작은 서울이라 불렀지. 조기 어망이 떠오를 때 보면 온통 황금빛이야. 줄을 잡아 올리면 금빛이 반짝반짝 하는 게 참 보기 좋았지.” 인천에서 시집와 40년 넘게 연평도에서 살았다는 이기숙 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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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바다를 지키는 해군에게 먹을거리를 건네는 연평도 사람들.

애당초 연평도에서의 조기잡이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1636)이 일어난 뒤 임경업 장군(1594~1646)은 배를 타고 청나라로 향하던 중 연평도에 들르게 되었다. 식량이 모자라던 차에 장군은 연평도 안목에 이르러 가시나무를 바다에 죽 꽂아(어살법) 조기를 잡아올렸는데,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연평도의 충민사는 바로 그런 임경업 장군을 기리고 숭배하고자 세운 사당이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연평도는 해주가 생활권이었으며, 시장도 해주로 다녔다. 여기서 해주까지는 뱃길로 30분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연평도 주민의 70퍼센트 정도는 황해도가 고향이며, 전쟁 때 피난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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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연평도에 살던 사람들은 갈림길에 서 있다. 대부분은 섬을 떠나 안전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고, 더러 삶의 뿌리인 섬을 떠날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연평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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